피씨방에서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업그레이드 하고 있다. 사방에 게임하는 애들이 쌍욕을 내뱉는 바람에 주간지 기사를 읽기에도 적절치 않다. 이럴 땐 그저 무언가에 빠져드는게 상책인데 달리 빠져들만한 꺼리가 없다. 그래서 워드패드 열어놓고 자판을 두드린다.
왜 집에서 하지 그러냐고 궁금해할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집에는 인터넷이 안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들 손에 스마트폰 하나씩 들고 있고, 딱히 컴퓨터를 할 일도 없는데 인터넷 요금을 따박따박 내는 건 불합리한 소비라는 의견을 가진 분과 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다. 따지고보면 집에서 컴퓨터를 할 일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주 내로 차량 내비게이션을 업그레이드 하라는 명령을 받은 지금 같은 때를 빼곤 말이다.
불편하지만 그게 평화를 위한 일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스마트폰 어플을 이용하면 되지 않겠냐는 그럴듯한 제안도 유용한 정보가 아니긴 마찬가지다. 그 분으로 말하자면 차량의 내비가 보시기에 더 편하다는 말 한 마디로 모든 사안을 정리할 줄 아는 분이다.
나는 평화를 사랑한다.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이라 옆자리 고딩이 게임을 하다말고 "야이 개새끼야~!"라고 소리를 지를때도 쳐다보지 않는다. (무서워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저들끼리의 다정한 호칭쯤 되나보다 생각하기로 한다. 70%쯤 남은 업데이트는 무료하고 글쓰기에 적당하지 않은 환경도 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왜 집구석에서 게임을 하지 않는것이냐는 나의 불만이지만, 불만을 드러내지 않은 채 웃음띤 얼굴로(무서워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다) 물어보면 고딩들도 나름 이유있는 항변을 하겠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예요 아저씨. 집에 계신 분들은 제가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인생은 승부의 연속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당최 제가 게임하는 꼴을 못보시네요.
아 그렇구나. 그러고보면 피씨방은 너나 나처럼 평화를 위하는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완충지대 같은 곳이었구나. 설령 쌍욕이 넘쳐나도, 이 곳은 현실 세계의 갈등과 불화를 피하기 위해 모여든 진정한 평화주의자들의 공간이구나. 마치 지구에 쳐들어온 외계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작전을 모의하는 영웅군단처럼 저마다 검은 롱패딩으로 중무장한채 제 자리에 앉아 단지 소리만 질러서 소통하는 이유도 이제 알것 같구나.
피씨방에 들어온지 두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내비게이션 업그레이드는 35% 진행률에서 정체되어 있다. 회원권이 없는 사람은 사십분에 천원을 받는다고 주인 아저씨 같이 보이는 알바생이 단호한 표정을 짓는다. 사십분이면 될 줄 알고 천원만 결제했는데 벌써 몇번을 연장하는건지. 내비게이션 하나 업그레이드 하는게 이렇게 힘든데 대체 평화를 이룬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