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너 Dec 18. 2023

다시, 광역버스

광역버스에서 원대한 꿈을 꾸는 직장인


언젠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같은 경기도리언으로 주먹 울음을 울뻔했다. 경기도에 살면서 서울 중심권역으로 출퇴근을 하는 주인공 남매의 이야기가 마치 나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경기도는 서울을 감싼 계란 흰자 같아요.” 여자친구에게 차인 창희는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경기도를 계란 흰자에 비유한다. 노른자위에 사는 사람에게 그따위 하소연을 해봐야 소용없다. 그들에게 계란 흰자부위는 짐작도 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우리가 출근하기 위해, 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만 알 뿐이다.


나 역시 종점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산 넘고 물 건너 서울 중심부에 도착해서 또 간선버스나 마을버스로 갈아타는 고행을 하며 매일 출퇴근한다. 마흔 언저리부터 한 10여 년을 그렇게 다녔고, 앞으로 또 얼마간은 그래야 한다.


광역버스에서 하루 3-4시간 정도를 보내게 되면 누구나 백색소음과 진동에 익숙해지고, 허리를 세운 채로 쪽잠을 자는 능력이 향상된다. 그뿐 아니다.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다 보면 단거리 육상선수로 발탁될 만큼의 단단한 허벅지를 갖게 된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동체시력이 발달되기도 하고, 새벽에 눈이 저절로 떠지는 ‘강제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특별하게 신장된 능력을 묻는다면 글쓰기 능력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버스는 평일 중에 거의 유일하게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다. 페이스북은 그런 환경에 놓인 나에게 아주 좋은 둥지가 되었고, 페친들은 나의 광역버스 라이프에 볼모로 잡힌 인질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되나가나 글을 썼고 어지간한 글 한 편은 퇴근길 버스 안에서 교정까지 완성할 수 있을 만큼 버스간에서 쓰는 글이 숙련되기 시작했다. 버스는 구상의 공간이자 집필의 공간이면서 친교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다시 시작된 광역버스 라이프.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광역버스가 주는 긍정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를 계기로 뭔가 해야겠다. 고 다짐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하루 세시간의 오롯한 나만의 시간을 잘 활용하면.. 언젠가는 혹한기 혹서기, 야외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인내심과, 나만 두고 멀리 달아나는 버스 뛰어서 따라잡을 만큼의 달리기 능력과, 흔들거리는 버스에서 책읽고 글쓰며 단련한 동체시력을 갖춘, 아무데서나 앉으면 토막잠을 자는, 새벽다섯시만 되면 뻐꾸기처럼 일어나 집을 나서는, 그렇게 일찍 집을 나서 가장 먼저 잡혀먹히는 벌레같은 인간이 되어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퇴근이란 무엇인가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