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에 대한 다양한 학설들을 알아보자
퇴근이라는 말에서는 어떤 기대감 같은 감정이 느껴진다. 해방감이라고 해도 좋다. 아무튼 이 말을 들으면 고역을 치르다 풀려난 사람의 심정이 어떤지 알 것만 같다. 단지 퇴근이라고 했을 뿐인데 눈이 환해지고 머리가 상쾌해진다.
엔돌핀이던가 도파민이던가. 직장의 정문을 벗어나는 순간 긍정의 호르몬이 팍팍 쏟아져 나온다. 그렇다고 집이 딱히 좋거나, 집에 가면 뭐가 있냐 하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마시다 만 소주가 있고, 맨날 잔소리를 하는 아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퇴근이 좋다.
사실 퇴근이라는 말은 출근이라는 말 못지않게 무척 따분한 단어다. 하루의 중심을 ‘일’에 두고 그 외의 삶을 주변화하는 뉘앙스 아닌가. 평일이니 일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당연한지는 몰라도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조차 따분하다. 직장은 내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삶의 방편일 뿐, 나의 중심은 아니지 않나. 나의 중심은... 음...(말잇못)
퇴근이라는 말이 적절한지와 무관하게 그 의미는 명확하다. 근무지로부터 물러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가 퇴근한 상태인가. 단어의 뜻과 달리 그건 또 모호하다. 직장의 정문을 나서는 순간인가. 업무용 컴퓨터의 전원을 끄는 순간인가.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상태인가. 집에 도착하여 옷을 풀어헤친 순간인가. 사실 오랜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학계의 합의된 학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몇 가지 주장들이 난무할 뿐.
먼저 퇴근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학설은 ‘정문 통과설’이다. 정문은 직장의 내외부를 가르는 중요한 지형지물이다. 이 구역을 통과했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퇴근 전후를 구분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설 또한 하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문을 벗어났어도 사무실에서 고민하던 업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퇴근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심리적 퇴근설’이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퇴근설에 따르면 마음속으로 퇴근을 한 이상 설령 그 곳이 직장이라고 하더라도 퇴근을 한 상태로 볼수 있다. 퇴근 후 술자리 약속에 정신이 팔려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그는 이미 퇴근을 한 사람이다. 또 출근길에 억울하게 사고를 당해 다친 공무원이 있다 치자. 그의 상해와 출근이라는 행위 사이에 불가분의 연관성을 인정해서 이를 공상으로 보는 판례도 있지 않나. 단지 정문 통과를 두고 출근과 퇴근을 나누는 것은 큰 논리적 하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리적 퇴근설도 하자가 있긴 마찬가지다.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주말 출근을 하고 집에 와서도 계속 업무를 하는 상황이라 치자. 그는 틀림없이 심리적으로 퇴근하지 않은 상태겠지만, 아무리 심리적 퇴근설에 입각 해 근무중이라고 우겨본들 시간외 수당을 주진 않는다.
따라서 심리적 퇴근설은 현실성이 없어서 학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사무실문 통과설’도 있다. 그러나 사무실 문을 통과해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사장이 눈인사를 건넨다면 어떤가. 당신은 과연 퇴근했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사무실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잠시 들렀는데 부장님이 카톡으로 내일 일정을 물어본다면? 그래도 당신은 퇴근한 사람인가? 사무실문 통과설은 이러한 현실적 문제를 도외시한 무척 인기영합적인 학설로 소수설에 불과하다.
최근 강력하게 대두된 학설로 ‘시뮬라크르 퇴근설’이 있다. 퇴근도 일종의 가상현실이라는 매우 포스트모던한 학설인데.. 이런 이야기다. 당신이 퇴근을 한 것은 당신의 착각일 뿐이다. 출근과 퇴근이라는 형식을 도입한 것은 그 행위의 사실성에 기반해 왜곡된 환상을 주입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매일 가는 직장이 특정한 장소에 있다는 착각은 사실 이 세상 전체가 직장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가상현실의 전략이다. 디즈니랜드라는 공간이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는 건 온 세상의 유치함을 은폐하기 위해서인 것과 같은 논리다. 틀림없이 퇴근을 했지만 잠이 들때까지 일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부장의 카톡이 끊이질 않는 걸 보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세상은 온통 직장이고, 당신은 영원히 직장에서 퇴근하지 못한채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