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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Apr 07. 2016

스친다 사라진다 스며든다

길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스쳐가는 '것'이다. 길 위에서는 잠들 수도 없고 퍼질러 앉아 쉴 수도 없다. 서성거려서도 머뭇거려서도 안된다. 길 위를 서성이는 사람은 이방인이거나 부랑자로 의심받기 쉽다. 노숙인과 같이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만이 길 위에 자리를 잡는다. 길위에는 수 많은 이정표들이 범람하며 행인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잠시라도 발이 묶일 때 사람들은 좌불안석 초조해 한다. 길은 머물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는 살아도 부랑자요 죽어도 객사일 뿐이다. 길은 광장을 구심점 삼아 하나 둘 모여들기도 하지만 건물들 사이로 흔적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골목은 끼리끼리 끈끈한 문화를 만들고 광장은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지만 길은 그저 광장과 골목을, 개인과 집단을 연결해 줄 뿐이다. 길은 공간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항상 시간으로 환산된다. 길은 눈 앞으로 존재하다가 걸음 뒤로 사라진다. 길은 시간이 남긴 흔적이다. 길은 도시의 주름이다. 길은 깊어진다. 꼬인다.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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