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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l 02. 2016

영화 '데몰리션' 후기

분해된 냉장고에서 자신을 발견한 남자

1.

아내가 죽었다. 그녀는 운전석에서 조수석의 사내를 향해 냉장고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사내는 아내의 잔소리를 듣다가 그녀의 마지막을 목격해야 했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굉장한 폭발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이었다. 그의 기억은 몇 컷으로 나누어진 카툰처럼 잘게 토막 나버렸다. 예고 없이 다가오는 모든 것들은 또 아무 일도 아닌 듯 무심히 지나가버리는 법이다. 그는 자신을 바람을 걸러내지 못한 그물 같다고 생각했다. 허탈했다. 몇 가지 걸러낸 기억이라고 해봐야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2.

사내는 글을 쓴다. 자판기 회사 소비자센터에 보낼 편지다. 아내가 사경을 헤매던 밤, 병원 복도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초컬릿을 구매하려다가 자판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돈만 날렸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자판기가 고장 나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금전적 손해를 봐야 했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왜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와 아내의 참혹한 죽음에 대해 썼다. 거기에 덧붙여 정중하게 자신의 속마음까지 다 쓰고 나니 비로소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아내의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회사로 돌아온 사내는 가장 먼저 자판기회사에 편지를 부친 후 하던 일에 몰입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치 뫼르소처럼.

자판가 회사로 보낸 사내의 편지는 캐런에게 전달된다. 캐런은 편지 속에서 사내의 아픔을 읽어낸다.

3.

아내가 떠난 집은 적막하고 허전하다. TV 불빛이 침대의 모퉁이에 기댄 채 잠든 사내를 비춘다. 일상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면도를 하고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다가 그녀의 환영을 보기도 하지만 그립거나 불편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는 변화 없는 일상을 묵묵히 견뎌낸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는 냉장고에서 물이 샌다던 아내의 말을 기억해낸다. 냉장고에서 물이 새다니. 무언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사내는 냉장고를 분해하기로 마음먹는다.


4.

냉장고는 분해하기 만만치 않은 물건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지만 대부분의 물체들은 다른 물체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야만 비로소 제 역할을 해낸다. 하물며 냉장고 같이 거대한 물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도 사내는 냉장고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 그저 자신이 살아온 만큼의 무게를 실어 묵묵히 내리치고 뜯어낸다. 그럴싸했던 존재들이 모두 보잘 것 없는 부속품들로 해체되는 순간, 사내는 무언가 모를 해방감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구성과 해체라는 유기체의 운명을 타고 난 셈이다. 사내는 사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냉장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사내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를 깨닫는다. 평범한 것 같았지만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아내와의 관계에도 무감각했고 모든 것의 본질을 알려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고장 난 냉장고였던 셈이다.


5.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어떤 실존적 인물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자판기 회사의 여직원이 회신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판기 회사의 여직원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녀는 사내에게 마음이 쓰였다. 서로 다른 유기체의 부속품이던 사내와 그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녀의 만남이지만 성적 긴장감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아내와 사별했고, 그녀는 아들을 키우며 자판기 회사의 사장과 동거하고 있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둘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데 만족했다. 물이 새는 냉장고와 선이 낡아 고장 난 티비는 서로 어울리지도, 결합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순간, 서로의 고장 난 부위를 알아보는 유일한 존재다.

6.

여자에겐 어린 아들이 있다. 아이는 세상을 직시하는 용기를 가졌다. 가끔 심한 표현과 도발적은 행동으로 어른들의 눈 밖에 나긴 해도 동년배 남자아이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혼란스러워 할 만큼 순진한 구석도 있다. 긴 금발머리에 창백한 얼굴을 한 소년은 한 때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에드워드 펄롱을 연상케 한다. 욕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늘을 가진 외로운 아이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사내는 아이의 외로움을 읽어낸다. 사내는 여자와 맞닿았던 부분과는 또 다른 면으로 아이와 접촉한다.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면, 사내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준 유일한 사람인 셈이다. 총을 쏴보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기꺼이 방탄조끼를 입은 채 자신을 목표물로 내어주는 사내, 그런 사내에게 아이는 음악을 선물하고 사내는 아이가 만들어 낸 비트에 맞추어 몸을 흔들어 댄다. 사내는 즐겁지 않지만 즐거운 듯 춤을 춘다. 그의 춤은 세상에서 고립되어 내안의 근원과 마주하고 싶다는 절절한 표현으로 보인다. 사내와 아이는 마침내 문제를 직시하기 위해 세상을 해체해보기로 결심한다. 해머와 전기톱, 불도저까지 동원한 그들 앞에 세상은 또 어떤 모습으로 민낯을 드러낼까.

7.

무언가를 파괴한다는 건 고통스럽지만 또 한편으로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겉으로 멀쩡한, 아니 완벽에 가까운 것들도 도끼와 해머가 지나가고 난 후엔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빛이 나던 대리석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조각이 나버리고, 반듯한 샷시 프레임도 전기톱에 반이 잘려나가면 보잘 것 없는 고철이 되는 식이다. 최신형 삼성 티브이 모니터든, 세탁기든, 유리공예품이든 사내와 아이의 손을 거쳐 완벽한 고물이 된다. 어찌 보면 세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구성되지 않거나 연결되지 않으면 고철에 불과한 문명들 앞에서 관객들은 통렬한 해방감을 느낀다. 카메라는 해체 작업을 마치고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 사내를 보여주며 묻는다. 당신 안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당신도 해체가 필요한 사람 아닌가요?


8.

자신의 일상을 해체하는데 성공한 사내가 유일하게 복원해놓는 것이 있다. 메리고라운드다.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놀이기구다. 롤러코스터와 같이 무중력상태의 공포를 체험할 수 있는 수많은 놀이기구들이 있지만, 메리고라운드는 그에 비하면 놀이기구라고 부르는 것 조차 민망할 만큼 단순하다. 꽃과 조명으로 장식된 나무말 위에 올라타 느린 속도로 일정한 트랙을 도는 것이 메리고라운드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의 전부다. 그러나 그는 메리고라운드에서 아내와의 행복한 한 때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죽은 아내도 장학재단 설립보다 장애인을 위한 메리고 라운드에 더 기뻐했을 것 같다.


9.

엔딩 장면에서 관객들은 울컥한다. 비로소 모든 문제를 깨닫고 번민으로부터 해방된 자의 표정을 볼 수 있다. 그 표정을 보여주기까지 제이크 질렌한은 만 가지 표정으로 고통스러운 사내의 속 마음을 보여준다. 그의 크고 깊은 눈빛은 절제된 언어를 담아낸다. 나오미 왓츠는 노련하다.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지적이고 아름답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드워드 펄롱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유다 루이스는 강렬한 씬스틸러다. 무엇보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 이어 이번에도 기존에 없던 영화를 보여준 감독, 장 마크 발레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만큼 최고다.


10.

2016년 7월 12일 개봉한다. 나는 지인을 잘 둔 덕에 시사회에서 미리 봤다. 8시부터 시작하는 시사회 시간 때문에 미리 반주로 소주를 네잔쯤 마시고 봤던지라 초반에 잠깐 졸았다. 억울해서 놓친 부분을 다시 보러 갈 예정이다.


#데몰리션 #제이크 질렌할 #나오미왓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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