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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너 Jun 26. 2016

영화 '500일의 썸머' 후기

어떤 연애 고자의 이별극복기

성장 영화라고 해서 반드시 십대 청춘들이 벌이는 캠퍼스 이야기여야 한다는 법은 없죠. 어차피 불완전한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장은 죽을 때 까지 계속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영화 <500일의 썸머>는 결혼 적령기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성장기입니다. 톰(조셉 고든 래빗)은 운명 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연인 썸머(조이 드 샤넬)와의 이별을 겪은 후에 도통 마음을 잡지 못합니다. 억울하기도, 부끄럽기도 한 그의 기억들은 파편화된 에피소드가 되어 순서도 없이 스크린에 재구성됩니다. 틈이 날 때마다 그녀와 보낸 500일을 반추해보는 셈이죠. 대체 왜 헤어지게 된 것일까.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톰은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을 버림받은 피해자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톰의 시각을 따라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이 아닌 ‘억울한 이별의 과정’을 더듬어 갑니다. 대체 그가 보낸 500일과 그녀가 보낸 500일은 대체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요.      


톰은 건축을 전공했지만 카드 문구를 쓰는 일을 합니다. 언젠가는 없어질 건물보다 영원히 누군가의 마음에 남는 문구를 만드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그는 건축가의 꿈을 아주 버리지 못하죠. 미련은 남지만 용기는 내지 못하는 남자, 그게 톰입니다. 톰은 일 뿐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도 소극적입니다. 그는 늘 “운명 같은 사랑”을 꿈꿔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썸머와의 사랑도 카드 문구 같이 감동적이고 동화 같은 사랑이길 바라죠. 그러나 그는 운명이 자신을 덮쳐오기만을 바랄 뿐, 자신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썸머는 어릴 적에 부모의 이혼을 겪었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검고 부드러운 머리를 가위로 쑹덩 잘라내도 전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은 여자입니다. 그녀는 남녀 간에 영원한 사랑이라는 건 없다고 믿습니다. 톰은 그녀에게 단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친한 남자친구일 뿐인 셈이죠. 누군가의 무엇이 되는 걸 그녀는 극도로 경계합니다. 사랑이 상대에 대해 배타적 소유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님을 일찍 깨달은 썸머는 대신 능동적이고 세심하게 상대에게 다가섭니다. 톰의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관심을 표하고, 어색한 탐색전을 깨고 먼저 키스를 시도합니다. 건축의 꿈을 버리지 못한 톰에게 자신의 팔뚝을 캔버스로 내줄 수 있을 만큼 상대를 배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매사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던 톰은 썸머 그 자체보다 관계에만 집중합니다. 사랑이라는 건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그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썸머가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맞춰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영화를 보고 눈물을 펑펑 쏟는 썸머에게 왜 우느냐고 묻는다거나 링고스타를 좋아한다는 썸머의 취향을 비웃는 식입니다. 톰은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말이 아픔에서 비롯된 것임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문신을 못하게 하거나 다른 남자의 추근거림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식으로 소유권을 행사하려 할 뿐이죠. 역시 그는 상대와 거리를 좁혀가는 방식에 서툰 남자인가 봅니다. 썸머는 연애고자인 톰에게 지쳐만 갑니다.     

 

그런 두 사람이 오랜만에 지인의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재회합니다. 이 번에도 썸머가 먼저 다가오지요. 톰은 속으로 관계가 다시 시작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보지만 여전히 그는 운명이 자신을 뒤흔들어주길 바랄 뿐입니다. 썸머의 초대로 간 파티에서 그는 운명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썸머는 이미 다른 남자로부터 프로포즈를 받고 결혼을 결심한 것이죠. 운명 같은 여자가 남의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 뒤로 톰은 찌질하게 무너집니다. 그가 생각했던 운명 같은 사랑은 애당초 없었던 것이죠.      

한참의 시간이 흘러 톰은 결혼을 한 썸머와 우연히 마주칩니다. 여전히 그는 그녀가 왜 자신을 떠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그녀가 돌연 한 남성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던 거죠. 그런 그에게 그녀는 말합니다.    

  




“도리안 그레이의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책에 대해 물어봤어.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야. 지금은 운명을 믿어, 네가 옳았어. 톰”     




운명이라고, 영원할 거라고 말하면서 누군가 먼저 다가와주기만을 바라고 배려하기보다 소유하려했던 톰에겐 뼈아픈 말이었을 겁니다. 자신은 상대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남자는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톰은 운명을 믿고 기다리는 남자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남자로, 썸머는 운명 같은 남자를 만나 사랑을 이루는 여자로 바뀌어 갑니다.      


영화 <500일의 썸머>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모두가 운명처럼 맺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이별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었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상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것, 희생하고 배려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설령 이별을 한다고 해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 그게 사랑의 본질 아닐까요. 그 어떤 러브스토리보다 사실적으로 사랑과 이별을 겪는 남녀의 심리를 그려내는 영화, 사랑에 빠지거나 이별의 아픔에 지금 힘들어하는 청춘들이 있다면 한번쯤 위로가 될 수 있는 영화 <500일의 썸머> 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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