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10미터 : 水深 혹은 愁心 10m로 들어가는 길
프리다이빙을 배운 경험을 토대로 무언가를 이야기를 하려하니 마치 내가 무슨 프로 다이버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라는 마음에 여러차례 주춤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근사하게 물속에서 유영하는 멋진 다이버가 아닌 매번 온몸을 긴장으로 무장하고 마치 깍두기처럼 어느 그룹에 끼든 제일 더디고 힘들게 따라가는 나의 경험이 결코 가치없지 않았다는 걸 남이 아닌 바로 내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다이빙 수업이 있는 전날에는 혹시라도 나의 경건하고 눈물겨운 다이빙 수업에 방해가 될까 카페인이 방해된다면, 거의 중독 수준의 커피 섭취를 잠시 멈추고, 부족한 수면이 혹시 방해가 될까봐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밥을 먹으면 속이 울렁거려 방해될까 당일 아침 끼니도 거르면서 대비했다. 그렇게 준비한 나의 다이빙 수업은 매번 간발의 변화를 살짝 보여주고 끝나 버렸다. 그렇게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실망과 뭔지 모를 서러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 그렇게 긴장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나에게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프리다이빙 강사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물 속에 들어가다가 정말로 힘들면 나오시면 되는 거예요. 억지로 참으시지 않다도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조금씩만 더 들어가 보시면 돼요. ’ 어쩔 때는 긴장감으로 뭉쳐있는 내 어깨를 주물러 주기도 하면서, 내가 나의 두려움에 지지 않도록 지켜봐주고, 기다려주었다. 그 조용한 기다림이 나에겐 큰 위로이고 힘이였다. ‘혹시 내가 너무 버벅되고, 머뭇거려서 짜증이라도 나면 어쩌지? ’ 옆에서 어떤 동요도 없이 기다려주는 강사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 적도 태반이었다. 그러다가 이러한 나의 생각이 내가 무언가를 하다가 포기하는데 중요한 이유가 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무언가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나의 성격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 동료들에게 대인관계에서의 나의 문제를 이렇게 이야기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힘들데 되는게 싫고, 그래서 최소한의 관계만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니 이 말은 남들이 나를 내 생각과 다르게 보는 것이 불편하고 싫다는 것을 우아하고 이타적인 버전으로 바꿔서 말한 표현이었다. 배운 것을 이렇게 써먹고 있었다. 물론 타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게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는 것은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이제야 고백하건데 난 꽤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완벽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없는 일에는 내 일이 아닌 듯, 관심이 없는 듯 가지치기하며 내 삶에서 제거해가며 살아왔다. 난 그러한 나의 삶이 꽤 쿨하고 궁색하지 않은, 나름 괜찮은 삶이라고 믿어왔다. 남들도 그렇게 봐주도록 얼마나 포장하고, 얼마나 열심히 가지치기를 해댔던지 이제야 지난 내 모습이 보인다. 그런 내가 이번에도 습관적으로 했던 마음으로, ‘쟤네들이 날 얼마나 우습게 볼까. 그냥 관두자. 내가 뭣하러 이런 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을 졸여야 돼!’ 라며 몇 번 물질하다가 그만두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내 마음의 습관을 이겨낸 경험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무슨 관련이 있길래 나는 자꾸 이야기하겠다고 하는 걸까.
나는 색채를 매개로 예술치료를 하는 6년차 색채심리사이다. 그리고 현재 심리 상담사가 되기 위해 수련 중에 있다. 색에 무심했던 내가 색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는 인간의 감정에 깊이 관심을 갖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첫 번째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인생은 예측불허이다. 색과 함께 엮이는 다양한 감정의 반응들을 보면서 점점 감정적 존재로서 인간인 우리에게 애정을 갖게 되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우선시 하는 일상에서 밑바닥에 꼭꼭 숨겨놓은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도록 도와주는 일이란 인내심이 필요하다. 의무적으로 기다리기만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갖고 기다려 줘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직접 이야기하는 그들의 삶으로 초대될 수 있다. 그 애틋한 기다림이 나의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해줬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