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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a Mar 02. 2020

책 82년생 김지영은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

나는 90년대생이지만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을 읽는 순간까지 낯선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공감됐으며, 내가 직접 겪지 못한 다소 예스러운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가 살면서 겪고 느끼고 보고 들었던 것들이다. 주변 남자들에게 가볍게 이 책에 대한 얘기를 하면 "친구들이 그거 보지 말라던데.", "그거 너무 옛날이야기 아니야?", "우리 엄마 생각이 나서 짠하더라.(그나마 양반)", "우리 세대랑은 상관없는 얘기잖아.", "나는 그런 문제에 대해 거론하고 싶지 않아."라는 반응으로 나뉜다. 반면 여자들은 하나같이 공감한다. 나는 82년생이 아니다. 하지만 책 속의 이야기들은 전혀 낯설지 않다. 왜 내 또래의 남자들은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이 이야기들이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소설 '도가니'는 아주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진실은 결코 외면해서는 안된다. 82년생 김지영도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불편하지만 직시해야 하는 현실을 담은 책일 뿐이다. 비난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이 읽고 공감해야 하는 이 책이 어쩌다 페미니즘을 운운하며 이상한 사상이 집약된 책으로 치부되어야 했을까.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모른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확실히 보통의(?) 여자들과는 달랐다. 상대가 어떤 위치에 있는 남자라도 내가 불편함을 느끼면 직설적으로 표현했기에 어릴 때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겪는 불편함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 초등학생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괴롭히던 남자애의 고백 편지를 찢어버릴만큼 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괴롭힘에 지칠 대로 지쳐 나는  아이가 죽도록 미웠다.  아이는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은 듯했지만, '남자'들은 좋아하면 괴롭힌다는 것은 내게 당연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 성희롱을 당한 여자애들이 꽤 많다는 거에 깜짝 놀랐다. 내가 당한 성추행과 성희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산 같은 걸로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는 미친놈 앞에서 야무진 내 친구는 한 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나 역시도 밀폐된 지하철을 탈 때 근처에 변태같이 생긴 놈이 있으면 죽일 듯 째려보곤 했다. 그러면 상대방도 언짢은지 멀찍이 떨어졌다. 걸핏하면 성희롱을 당하는 그 친구에게 나처럼 해보라며 꿀팁을 줬다. 내 표정이 웃기다고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는 몰랐다. 왜 이런 고민을 여자라는 이유로, 내 친구가 골반이 크고 예쁘다는 이유로 해야 하는 건지. H라인 스커트나 딱 붙는 청바지를 즐겨 입었던 그 친구의 옷차림이 잘못된 걸까?


한동안 공용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면 벽에 있는 구멍들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곤 했다. 아직도 외진 건물에 있는 공용 화장실은 핸드폰 없이, 일행 없이 가기가 겁난다. 뉴스에서 나온 화장실 성폭행 사건이 남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런 걱정을 해야 하는 걸까. 불필요하고 번거로운 일인데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야 몰카를 돌려보는 게 범죄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82년생 김지영 세대 속의 남자들은 그게 범죄인지조차 몰랐다. 10년도 넘어서야 당연한 것들이 조금씩 인지되고 있다. 어떤 나라에 가면 자리에 가방을 잠깐 두고 화장실을 가도 누가 훔쳐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걸 시민의식이 좋다고 표현한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나라는 단 한순간도 내 물건에서 눈을 떼선 안된다. 누군가 내 물건을 훔친다면 부주의한 물건 주인을 탓하기보다는 열악한 치안 환경과 범죄자를 비난한다. 같은 범죄인데 왜 피해자가 '조심했어야지.'라는 상처 받는 말을 들어야 할까?


회식 자리에서 쓸개 빠진 상사 놈이 여자 몸매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하거나 가끔 내게 도를 넘는 성적 농담을 할 때가 비일비재했는데 그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저한테 성희롱하시는 거예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직원이 들을 수 있도록. 그러면 꼭 그런 찌질한 놈들은 두 번 다시 날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은 어땠을까. 신입시절 첫 회식자리에서 '네 얼굴에 파묻히고 싶다'는 더러운 희롱을 했던 인사팀 대리 앞에서 나와 내 동기들은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내 동기 두 명은 그 미친놈에게 쉴 새 없는 찝쩍댐을 당했고, 그 후에도 두어 명의 신입사원을 퇴사하게끔 만든 뒤에야 겨우 성희롱 사유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요즘이야 이런 사건 사고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많은 여성들이 힘을 합쳐 '말로만' 후두려 패니까 남자들이 조심스러워졌는데 이건 진작에 지켜야 할 예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피해 사실을 밝힌 여성은 꽃뱀 논란, 같이 좋아서 한 게 아니냐는 의심, 또 다른 성적 대상화로 날 선 비난과 수치스러움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운 좋게도, 열린 마음을 가진(?) 남자 교수님의 권유로 일찍 취업했지만(책에서는 교수들이 남학생들에게만 추천 채용 혜택을 줬다고 나온다.) 능력 좋고 성격 좋은 내 친구들은 몇 년 동안 취업이 되질 않았다. 매번 술만 마시고 학점도 엉망에 스펙도 없는 남자 동기들은 곧잘 취업이 됐다.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남자가 스펙이라고 했다. 왜 이게 농담이지만 농담으로 들리지 않아야 하는 걸까. 내가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여자 나이 계란 한 판, 크리스마스(25살 때부터 꺾인다는 말을 조롱하는 표현), 남자는 와인이라 30살부터 성숙해진다는 불편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딴 농담 같지 않은 말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저 웃기만 해야 했을까. 나는 질세라 내 주변 많은 남자들을 후려쳤다. (잘생겨도 예외는 없었다.) 남자가 와인이라는 말은 자기들끼리 위안 삼으려고 지어낸 말일 뿐이라고 했다. 여자들은 그나마 관리해서 나은데 남자애들은 아무것도 안 해서 자글자글한 주름이며 뚫어진 모공, 몸에서는 홀아비 냄새가 난다고 했다. 어떤 잘생긴 오빠는 내 말이 충격이라도 됐는지(사실 충격이면 안됐다. 여자들은 후려치기 당하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왔는데 남자는 그러질 않아서 충격인 게 아닐지) 그 말을 몇 년간 기억하고 있다가 서른이 넘어 만날 때 자기 몸에서 냄새 안나냐고 했다. 조금 통쾌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 성질났다 하면 "남자가 말이야, 부엌에서 일하는 게 말이 되냐~?"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오늘 집안일은 다 하라고 소리쳤다. 우리 친할머니는 침이나 질질 흘려대는 손주를 좋아했다. 그 애가 애교가 많은 것도 아니고 말도 제대로 못 해서 특별히 예뻐할 이유는 없었다. 그나마 친척 중에 딸이 많아 괜찮은 편이었지만, 친구들 중에서는 남아선호 사상에 상처 받은 여자애들이 꽤 됐다. 이것 말고도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다. 82년생 김지영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나는 내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속 시원하게라도 살았던 것이다. 대신 기 센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피해 갈 수 없었다. 올바른 말만 했던 나는 왜 기 센 여자라는 인식을 피할 수 없었던 걸까?


남자들이 내게 이상형을 물을 때 일단 외모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못생긴 놈들이 꼴값하면 용서할 수없다고 했다. 대부분이 쭈굴대며 물러났지만 일부 반항적인 놈들은 외모지상주의라며 비난하려는 낌새를 보였는데, 그러자마자 네 놈은 외모 안 보냐며 네 이상형 말해보라고 했다. 약 10년 이상이 흐른 뒤에야 내 주변에 많은 여성들이 하나같이 고백하기를, 남자 외모를 본다고 하면 김치녀처럼 보일까 봐 지적인 남성, 웃는 게 예쁜 남성, 능력 있는 남성이 이상형이라고 했단다. 놀라웠다. 나 혼자 다른 세상에 사는 줄 알았다. 요즘 괜히 댓글 창에 '어리고 잘생긴 놈들이 최고지.'라는 말이 늘어난 게 아니다. 아직도 2~30대 여자들 사이에서 '여자는 어리고 예쁜 게 깡패'라는 말이 돌아다닌다는 게 씁쓸하다. 능력 좋고 똑똑하면 멋있게 치켜세우는 게 아니라 드세다며 물러난다. 이런 세상 속에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82년생 김지영 책을 단순 페미니스트 어쩌고 하며 욕할 수 있을 것이며, 같은 90년대 남성들은 이 책을 외면하고 의견 나누길 불편해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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