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2016)
나는 매일 전화를 한다. 요즘 대화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한다. 하루 종일 말을 안 하는데도 전화 하는데 왜 이렇게 할 말이 없는지, 사람들은 대체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지. 사람들이랑 있을 땐 말을 많이, 큰 목소리로 떠벌떠벌 잘만하는 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정말 내 중심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지 못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며 후회하는 일이 허다하다. 전화할 때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재가 없다는 말이다. 소재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어쩌면, (특히 요즘)내 삶을 뜯어보는 마음의 돋보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패터슨씨는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산다. 아내와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서 시계를 보고, 길을 걸어 출근을 해서, 버스에 앉아 친구의 불평을 듣고, 버스운전석에 하루종일 앉아, 버스 루트를 따라 하루종일 버스를 주행한다. 점심을 먹고, 정시에 퇴근하여, 쓰러진 우체통을 세우고, 똑같은 집에 들어서 저녁을 먹고, 개를 산책시키고, 펍에 들러 맥주를 하잔 하고, 집에 돌아가 잔다. 그리고 눈을 뜨면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그렇게 매일이 반복된다. 이것은 어떤이의 시선에선 지루하고, 권태롭고, 별볼일 없는 삶이다.
짐자무시는, 그의 카메라는, 그 반복되는 삶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그리고 하나씩 발견한다. 그와 아내는 매일 아침 다른 자세로 자고있다는 것을. 그가 일어나는 시간은 여섯시 십분에서 삼십분 사이 어느 즈음이며, 시간은 매일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내는 매일 다른 꿈을 꾸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버스에 올라탄 승객들의 흥미로운 대화는 매일 바뀐다는 것을. 이름도 모르는 그들이 어제 무엇을 했는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엿듣는 것이 재밌다는 것을. 그들은 때로 같은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을. 패터슨 시에는 쌍둥이가 유난히 많다는 것을. 그 쌍둥이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하다는 것을.
마치 다른 그림 찾기 문제를 내듯 어제와 오늘의 변주일상의 호수에 매일처럼 던져지는 돌로 인해 일어나는 파동들의 차이를 그려내는 그의 카메라. 어림잡아 보면 반복처럼 보였던 것들이, 들여다보면 변주였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파동은 여느 블록버스터나 드라마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호수 전체를 뒤흔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파동은 분병히 매일 다른 모습이다. 어떤 날은 누군가 더 큰 돌을 던지며, 어떤 날은 작은 돌을 던진다. 그로인해 패터슨씨의 어떤 날은 조금 우울하고, 어떤 날은 좀 더 행복하다. 이것이 실제의 우리고, 우리가 사는 일상이다. 짐 자무시는 우리의 이야기를 영화로 내놓은 것이다.
나에게 오늘은 무척 피곤했다. 어제 늦게 잤는데 일찍 일어나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볼 짬이 앞으로 없어 오늘 꼭 보려고 커피를 원샷 하고 30분 거리에 있는 아트하우스 모모까지 추위를 뚫고 걸어갔다. 나는 주로 티켓을 모으는 편인데, 모모의 티켓이 예뻐서 좋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집에 붙이려고 영화팜플렛을 이것저것 챙겨왔다. 오는 길에 마주친 광경. 이슬이랑 비슷하게 생긴 포메라니안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주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안겨 엉덩이를 찰싹 맞고 있었다. 여자가 후드를 씌워달라고 했는데 남자가 잘 못씌워주자 여자로부터 면박을 받았다. 집 근처지만 다니지 않던 골목이라 서대문 우체국 즈음에서 길을 잃었다. 그 때 였나, 불현듯 모모 티켓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티켓이 없었다. 나는 길도 잃고 티켓도 잃은 채 서대문 우체국 앞에서 잠시 헤메다 티켓을 포기하고 길을 찾아 왔다. 만약 이 이야기가 그가 애정을 가진 대상으로부터 시작됐다면 짐 자무시는 이 얘기로도 영화를 만들 사람이다. 패터슨은 그가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 속 이런 얘기다. 이런 얘기고, 이런 영화다.
앞으로 가도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그러니까 결국 뒤로 돌아오게 되는 원형의 모양을 한 시간의 길을 매일처럼 지나야한다면 무기력함과 권태를 느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매일 그 길을 가꾸고 살핀다면, 애정과 호기심으로 바라본다면, 매일 같이 그곳을 걸어야함에 처연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반복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 바로 이것일테다. 반복 속에 숨은 아름다움 찾기. 거기에서 오는 행복.
오늘, 나는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았다. 대신 메세지를 남겼다. 오늘의 일상이라는 호수에 일어난 파동에 대하여. 반복 중심이 아니라 변주 중심으로. 오늘은 어제와 대체로 같았지만앞으로도 인생은 대체로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달랐던 점을 중심으로. 영어 문장 읽듯 주어, 술어, 목적어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사랑 형용사를 잔뜩 넣은 문장꾸러미를 남겼다. 기본적 뼈대가 늘 같은 일상간의 차이를 묘사할 때 중요한 것은 부사와 형용사다. 구체적인 것. 미시의 세계.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파동의 차이를 탐지할 수 있기를. 그걸 잔뜩 너에게 전해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