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home
보고 싶은 친구들을 추억하며, 친구들과 함께 보낸 중국유학생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지금도 그 곳에는 여전히 사랑하는 저의 친구들과 그 가족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살던 곳은, 중국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중심도시, 우루무치이다. 무려 8개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다채로운 문화들을 간직하는 땅. 아주 먼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며 동서양의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곳.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였던 곳에 내가 일년을 살게 되었다.
2017년 2월
이 곳에 온 지 일주일 쯤 되던 날, 한국인 선생님과 함께 내가 앞으로 다니게 될 대학교에 방문했다. 나는 학생비자로 살면서 일년동안 어학당에서 언어를 배울 예정이었다.
겨우 간단한 자기소개 정도만 가능했던 나는, 학교를 돌아다니는 동안 현지인과 눈 마주치는 것이 내심 두려웠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을 수 없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신기하게 보는 이들이 많았지만, 왠지 대화로 이어질 것 같은 눈빛은 은근슬쩍 피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대화를 잘 하는 편이지만, 나는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앞으로 다니게 될 대학교의 구석구석을 소개해주시면서 언어공부의 꿀팁을 이야기하셨다.
현지인 친구를 만들어서
대화를 많이해야
언어가 금방 익숙해지고 늘거야.
일단 듣고 말하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게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현지인 친구를 사귀는 것을 나의 첫번째 미션으로 주셨고, 학교 내 매점 2층의 작은식당으로 함께 들어갔다.
아직 학기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몇몇 학생들이 음료와 간식들을 먹고 있었다. 한 5분 정도 이 낯선 공간을 둘러보고 있던 찰나, 한 쪽 끝 테이블에 혼자 앉아 간식을 먹고 있는 위구르족 여학생이 있어 선생님이 먼저 말을 건네셨다. 그리고 나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도 겨우 몇마디를 꺼냈다.
선생님은 그 친구에게 사는 곳*과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전공에 대해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셨고, 우리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그렇게 나에게 첫 위구르 친구가 생긴 것이다.
*우루무치에서 대학을 다니는 위구르 친구들은 대부분 다른 지방도시에서 살다가, 대학을 다니기 위해 우루무치에 와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는 곳(고향)을 물어보는 것이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좋은 연결고리가 된다.
나에게 첫 위구르친구가 생겼다. 친구 P는 미대생이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기숙사에서도, 반에서도 자신은 혼자인 것 같다고 했다. 마음이 외로운 친구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친구는 소수민족 특별전형*에서 미술 전공자로 6명을 뽑는데, 거기서 합격한 실력자였다.
*신장위구르자치주는 이름처럼 위구르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닝샤회족자치주, 내몽골자치주 등 소수민족들이 많이 모여사는 지역을 자치주로 이름지었다. ) 소수민족 전형은 소수민족이 많은 위구르 지역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국에선 서부 대개발 계획으로 신장 우루무치에 한족을 많이 이주시켰고, 지금은 한족과 위구르족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친구 P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대부분의 중국사람들이 그렇지만)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중국 드라마 앱으로 도깨비 / 미싱 나인 등 한국배우들이며, 유명한 음식, 지명 등등을 꿰뚫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학생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으며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은 내 영혼의 분식 - 떡볶이와 비슷한 니엔까오(중국식 떡볶이)를 먹기도 하고, 훠궈도 먹고, 한국음식점에 가기도 했다. 나는 이 친구랑 더 많은 수다를 떨기위해 열심히 단어를 모았다. (금방 늘진 않았지만) 매일 301句 책으로 문장을 외우고. 만나기 전에는 하고 싶은 말을 미리 번역도 하고. 그리고 어느 날은 내가 좋아하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번역해서 편지지에 적어주기도 했다. (뿌듯)
Mar, 2017
어느 날, 위챗(웨이신)을 주고받다가 이 친구의 엄마가 아프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일로 머리도 아프고 고민이 많다고 했다. 엄마는 몇 년째 투병 중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병명은 몰랐다.
우리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나의 소소한 즐길거리였던 문구점 투어도 함께 했다. 한국에서도 작은 수첩, 볼펜 등 문구류 구경이나 서점에 가서 책 보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이 곳에도 신화서점이라는 대형서점이 있어 종종 책구경 (정확하게는 책 표지 구경)을 하러 가기도 했다.
몇일 후,
친구는 나에게 부탁이 있다면서 엄마 약을 사러 가야하는데 함께 가달라고 했다. 그냥 약국에서 사면되는 줄 알았는데,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을 만나고 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한시간을 가서야 알았는데, 도착해보니 그곳은 정신병원이었다.
잠시 머리가 어질했지만, 함께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갔다. 의사 쌤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눈빛은 피하지 않았다. 중간 중간 싱긋 웃어보이기까지 여유를 부린 후, 친구는 처방전을 받고 상담을 끝냈다.
처방전을 받고 앉아서 약을 기다리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묵직한 분위기를 깨고, 나는 친구에게 처방전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고, 적혀있는 약 이름을 검색하면서 알게 된 친구 엄마의 병명은 조현병이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