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way home
어느새 방학은 끝이 났다. 약 두 달간의 방학 동안 나도 모르게 언어에 자신감이 생겼다. 우루무치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다니며, 상대방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막 쏟아냈다. 현지에서 실수하면서 배우는 언어야 말로 찐 공부가 되는 것 같다.
처음엔 식당에서 사람들이 속닥속닥 이야기하는 대화 조차 암호 같아서 (특히 위구르어로 섞어 이야기할 때는 더더욱) 안 들리는 것 자체가 너무 괴로웠다. 나는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주고받는 대화는 물론이거니와, 굳이 알아듣지 않아도 되는 다양한 소리들이 안 들리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길거리의 핸드폰 대리점에서 나오는 광고 소리, 식당에서 사람들의 수다떠는 소리 등..
하지만 이제 들린다. 그 암호 같던 소리들이 들리니, 왠지 모르게 맘이 놓였다. ㅋㅋ 전부가 아니어도 단어 몇개가 들리면 대충 그 내용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 정말 뿌듯했다. (그게 뭐라고..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난 왜 그리 궁금했던 걸까) 일상을 떠나,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가 나의 숨겨진 생존본능을 일깨워주었다.
Sep, 2017
개학을 하루 앞둔 날 오후, P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 학교에 오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그랬더니, 소식을 들었냐고 묻는다. 무슨 소식? 오늘 학교 기숙사에서 아프리카 외국인 유학생이 자살을 한 것이었다. 헉. 한국인 외에 현지 대학생들이랑 외국인 유학생들은 대부분 학교 안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데 ‘쿵’ 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모두가 그 안타까운 순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이었다. 나도 가슴이 철렁했지만, P는 너무 무섭다고 했다.
그 유학생 친구가 어떤 심적인 어려운 일을 겪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나도, 그녀도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생활하고 있던 터라, 그가 겪었을 외로움, 고립감들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내가 알기로 P는 외로움도 잘 타고 매번 무섭다고 하면서도 공포, 스릴러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이었다. 그리고 종종 악몽도 꾼다고 했다. 그녀가 심히 걱정이 되었다.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P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투루판 집에서 함께 보낸 시간 덕분인지 어제 본 것처럼 친숙했다. 방학 동안 여행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오늘 있었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잘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외국인 유학생 친구의 자살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친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부정적이고 어두운 마음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곁을 내어주고 있었다.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왠지 우리의 슬픈 마음도 환기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친구의 손을 잡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기도를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입에서 나온 것은 한국어였지만. 친구의 상황, 오늘 겪은 이 상황들, 모든 쓸데없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만한 충분한 조건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오늘 밤 마음을 지켜달라는, 천사 같은 P의 삶과 가족들을 마음껏 축복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무슨 기도를 했냐고 묻는 친구에게, 너는 정말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고. 가족들과 너를 보호해달라고 기도했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기도해주는 나를 친구로 만났으니까 좋지 ㅎㅎ 라며 장난스러운 말까지. 나는 그 운동장에서 무슨 용기로 그렇게 기도를 해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느 날, 친구는 그림 한 장을 선물해주었다. 삐뚤 빼 둘하지만 한국어로도 번역하고 사인도 담긴, 잊지 못할 선물이었다.
그리고 2018년 2월,
나는 다시 한국으로 귀국했다.
FEB, 2021
벌써 3년 전의 이야기이다. 해가 바뀌어도 매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내는데, 미대 1학년이던 P는 어느새 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에서 미술교사로 일하고 있단다.
몇 주 전, 친구와의 웨이신 대화.
“잘 지냈어? 진짜 오랜만이야"
"언니, 오랜만이에요.
어제 내 꿈에 언니 나왔어요! 잘 지내요?”
“새해 복 많이 받아! 와, 정말? 응 잘 지냈지.
넌 어때? 요즘 우루무치에 있어?
아님 투루판이야?”
“잘 지내요. 요즘 투루판에 있어요.”
“벌써 졸업했구나?”
“졸업했어요. 요즘 투루판에 있는 미술교육기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제쯤 이 친구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어렵게 배운 중국어 다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가봐야 할 텐데. 하루빨리 전 세계가 코로나 19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게 회복되어,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친구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