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어달리기 Feb 17. 2023

보자기처럼 싸웁시다

불안에 관한 이야기(2)

<할 말 많은 편지>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두 20대 여성의 다정한 시선을 담아낸 교환 편지입니다. 다섯 번째 주제는 ‘불안’입니다.




안녕하세요, 키키. 오랜만이죠.


까치까치 설날도 우리우리 설날도 지나갔고 이제 곧 3월이네요. 저는 대학 졸업식을 앞두고 있는데요. 더 이상의 개강이 없다고 생각하니 신나면서도 묘하게 서러워요. 학교로부터 ‘방생’된다는 사실이 뭐랄까, 황망하다고 할까요. 실컷 짚신 만드는 법을 배웠더니 이제 불길로 나가라는 말을 들은 기분이랄까요. 누구에게든 에? 라고 되묻고 싶은데 그럴 대상조차 없어 망연히 남겨진 느낌이랄까요.


말도 안 되는 비유를 적어 내릴 만큼 졸업생의 마음은 싱숭생숭합니다. ‘20대란 원래 불안한 거지. 그것이 바로 청춘!’ 같은 말로 제 삶의 장르를 바꿔보려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20대의 불안은 해피엔딩이 보장된 청춘 로맨스도, 실패마저 아름다운 명랑 스포츠도 아니에요. 따지자면 사회고발 스릴러에 가깝죠. 키키의 편지가 오르는 가스비에서 시작됐듯, ‘불안’은 사실 아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감정이니까요.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불안이 몽땅 사라질 거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물론 대부분의 불안은 ‘돈 걱정’에서 비롯되지요. 졸업생으로서 제가 느끼는 불안의 비중도 취업이라는 두 글자에 매여있을 가능성이 크고요. 하지만, 있잖아요. 새벽에 문득 깨어나 침대에 멀거니 앉아있을 때, 머리맡으론 취객의 고성과 앰뷸런스 사이렌이 들려오고 어둠 속에서 내려다본 내 몸은 너무 무르고 형편없을 때, 저는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을 느껴요.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불안이죠.


저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설명해 줄 언어를 무려 ‘의정보고서’에서 찾았는데요. 정의당의 장혜영 국회의원이 재작년에 발행한 의정보고서에는 그가 2020년 9월 정기국회에서 발언한 내용이 담겨있어요. 87년생인 그는 87년도에 민주화를 외치며 목숨 걸고 싸웠던, 그러나 지금은 본인들을 방어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정치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87년생인 저는 독재의 두려움을 피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두려움을 압니다. 무한한 경쟁 속에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나날이 변화하고 복잡해지는 세상 속에 내 자리는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온갖 재난과 불평등으로부터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지켜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누구를 타도해야 이 두려움이 사라지는지, 알 수 없는 두려움입니다.’

2020년 9월 16일 정기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 중, 87년생 청년 정치인이 87년의 청년들께


모든 문장이 그랬지만 ‘자리’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들어오더라고요. 저는 항상 자리가 없다고 느꼈거든요. 일자리뿐 아니라 그냥 자리요. 나라는 존재 자체를 받아줄 자리,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고 지켜주고 인정해 줄 자리요. 우스운 이야기로 들릴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그런 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저는 믿거든요. 이 사회 전체가 그런 자리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요.


물론 그런 뜬구름 같은 자리는 뚝딱 만들어지지 않죠. 뜬구름을 복잡하고 위험한 이 땅으로 가져와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려면 우리는 정말 많은 것들과 싸워야 해요. 법 제도 복지 정치권력 뭐 그런 재미없고 거대한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일단은 당장 ‘불안’과 싸워야 하죠.


그렇담 불안과 어떻게 싸우느냐? 제가 찾은 답은 ‘보자기’입니다. 가위바위보 게임에서요. 바위는 가위를 부수고 가위는 보자기를 자르는데 보자기는 바위를 ‘감싸서’ 이기잖아요. 그게 참 좋더라고요. 부수거나 자르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거요. 우리도 그렇게 싸웁시다. 불안이 밀려올 땐 그냥 감싸 안기로 해요. 흔들리고 게으르고 나약하고 무력하고 예민하고 기특한 나를, 빈틈없이 감싸 안고 이겨버립시다.


그러니까 키키가 하고 싶은 말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같아요. 불안은 내 탓은 아니고 내 것이니 차근차근 함께 살아가보자는 것. 그러기 위해 싸울 수 있는 것들과 싸워보자는 것. 혼자 싸우는 것이 힘들 땐 우리 서로의 보자기가 되기로 해요. 도무지 불안을 이기지 못할 것 같을 땐 말씀하세요. 제가 그놈의 자식을 왁 껴안아 없애버릴게요. 하하.


3월은 시작의 달이라고 하죠. 어디든 당차게 나아가시기를. 저도 그럴게요.



2023.2.16.

사하 보냄.

작가의 이전글 남들을 보는 만큼 나를 봐주기로 다짐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