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는 여행 대신 비우는 한 달 살기
여행과 살아보기의 차이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 갈린다. 유명한 곳을 몇 군데 더 가느냐가 아니라,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될 하루를 얼마나 많이 보내느냐에 있다.
브리즈번에서의 한 달 동안 우리는 로컬 마켓인 Coles에 자주 갔다. 항상 사는 토마토와 계란, 소고기와 복숭아의 위치를 기억하고 나만의 동선으로 물건을 담아 셀프 계산대를 통과하는 일이 어느새 자연스러워졌다.
매일 아침 고르던 복숭아는 겉보기에는 비슷했지만 맛은 매번 달랐다. 어떤 날은 유난히 달았고, 어떤 날은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내일 또 오면 되니까.
살아본다는 건 세탁기와 식기세척기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쓰레기 수거장의 위치를 알고, 어느 마트의 과일이 더 맛있고 저렴한지 알게 되는 일들이다.
여행에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지만 이런 사소한 반복이 쌓여 일상이 되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도 달라졌다.
어디를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함 대신, 오늘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는 여유가 생겼다. 공원에서 아이는 놀이터를 오르내렸고, 나는 벤치에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진으로 남길 만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돌아와서 가장 자주 떠오르는 건 그런 평범한 오후다.
여행을 하면 우리는 늘 무언가를 ‘채우려’ 한다.
일정을, 사진을, 경험을.
하지만 살아보기는 오히려 덜어내는 일에 가깝다.
해야 할 목록이 줄어들수록, 하루는 더 선명해진다.
브리즈번에서의 한 달은 고요하고 잔잔했다.
특별한 장소보다 반복된 동선이, 기억에 남을 사건보다 아무 일 없던 날들이 마음속에 더 오래 머문다. 어쩌면 살아보기를 완성하는 건 대단한 추억이 아니라, 아무 일 없어도 충분히 괜찮아지는 마음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