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 정책에서 메이커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뉴스를 봤을 때 우리는 조만간 공인중개사나 컴퓨터활용능력처럼 ‘국가공인 메이커 자격시험’이 나올지도 모른다며 낄낄거렸다. 메이커 문화는 새로운 창업 아이템 같은 걸로 취급되고, ‘3D 프린터 능력 3급’ ‘레이저커터 운용 기사’ ‘3D 프린터 조립기사’ 같은 이름을 단 자격증이 생겨서 어느 단체는 응시료를 받아 챙기고, 출판사에서는 수험서 장사를 시작할 게 빤하다고 예상했다. 불행히도 그때의 농담은 현실이 되었다. 2014년 12월 기준으로 이미 20, 30개의 3D 프린팅 자격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저마다 원조라고 주장하는 식당들처럼 자신들이 더 공신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3D 프린팅 관련 협회들이 이름을 걸었고, 정부 부처도 당연히 숟가락을 얹었다. 오픈소스로 누구나 만들고 시도할 수 있는 게 메이커 문화의 특징인데 자격증과 수료증으로 특정 사람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려 하다니. 앞으로는 메이커 커뮤니티에 자신이 어떤 걸 만드는 중인데 어떤 부분이 어려워 도움이 필요하다는 글보다는 자격증 시험 기출문제를 알려달라는 글이 더 자주 올라오게 될지도 모른다. 실소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 문제는 앞에서 다루기도 했고, 정부와 그럴싸한 직위를 명함에 박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멍청한 짓을 벌이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 이 정도만 언급하려 한다.
그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외부 인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평가, 우리 안에도 자신이나 타인을 두고 ‘이 사람은 메이커인가, 아닌가’를 평가해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에게만 인증서를 발급하는 심사관이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있었다. 짙은 고동색의 치마 정장을 입고, 양끝이 뾰족하게 위로 올라간 뿔테 안경을 낀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였다. 이 여자는 거의 반 년 동안 내 머리 속에 살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일이 있을 때마다 커다란 책상 뒤편에 앉아 내 이름으로 된 ‘메이커 인증서’에 커다란 ‘불인정’ 도장을 찍어 내밀곤 했다.
처음 메이커 문화를 접했을 때는 나를 메이커로 생각하는 데 저항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메이커들과 교류가 늘어나면서부터 조금씩 주저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굉장한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관심 가진 분야와 만들고 있는 것을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관심사가 사방으로 튀고, 잘 정리된 지식도 없어 간단한 걸 만들더라도 끝없이 인터넷을 뒤지고 수많은 실패를 거쳐야만 겨우 만드는 사람이었다.
메이커라는 단어가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라벨이 된 상황도 한몫했다. 정부가 수료증과 자격증으로 메이커들을 관리하려 들던 때처럼, 내 머릿속 심사관도 메이커라는 단어의 정의에서 마음가짐이나 시도, 관계처럼 모호하고 비전문적인 요소들은 죄다 잘라내고, 테크놀로지 기술과 지식, 스타트업이나 사업처럼 딱딱한 개념만을 남겼다. 그것으로는 나를 메이커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나를 소개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심사관에게 내 머릿속에서 퇴거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이 책을 쓰는 동안 나의 시작과 메이커 문화의 정신을 되돌아보면서부터였다. IT 전문가였던 마크 프라우언펠더는 닷컴 열풍이 붕괴한 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실험하기로 한다. 그는 직접 텃밭을 가꾸고, 닭을 기르고, 벌을 쳤다. 에스프레스 기계를 뜯어 튜닝하고, 수제 기타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메이커 잡지 편집자로 일하면서 자급자족과 손노동에 대한 관심을 이어간다. 그런 그가 하이테크에 지식이 없다고 해서, 메이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데일 도허티가 한국에 와서 강연했을 때 그가 나눈 메시지는 ‘우리 모두는 이미 만드는 사람’이며 메이커 문화의 핵심은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자는 것이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로봇을 만들고 아두이노를 잘 다루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삶의 주체가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그 가능성에 더 주목했다. 창작 공간 네트워크인 테크숍의 설립자인 마크 해치 역시 메이커 운동 선언문을 작성하면서 메이커 운동의 기본 정신을 되새겼다. 바로 만들고, 나누고, 배우고, 노는 것이다.
메이커란 무엇인가, 누가 메이커인가 생각할 때 기준이 그 사람이 무엇을 만드는지, 지금 무엇을 할 줄 아는지가 돼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사물과 세계에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런 기준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결론이 개인마다 다를 수도 있다.
기왕 모호한 기준이라면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치우쳐 해석한들 뭐가 문제겠는가. 우선 자신에게 메이커라는 이름부터 붙이자. 그리고 만들고 싶은 것, 이해하고 싶은 사물을 생각하자. 혹시라도 심사관이 찾아오면 ‘창조경제’ 담당자들하고나 놀라고 하자. 우리 각자가 자신의 스승이 되어 로젠탈 효과를 노리는 것과 같다. 서툶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메이커 문화는 소수의 전문가들이 이끌어온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공부하고, 만드는 것을 즐기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수많은 아마추어가 이끌었다. 탐구 대상에 한계가 없다. 실패도 가치를 인정받는다. 투신하기에 너그러운 세계다.
글쓴이: 물고기
*이 글은 2016년 11월 발간된 [손의 모험 - 스스로 만들고, 고치고, 공유하는 삶의 태도에 관하여] (릴리쿰 저, 코난북스) 원고의 일부 또는 가공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