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난 실크하니까

월간 실패 2012년 5월호

by reliquum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당시 우리의 아지트였던 호랑의 거실, 그 넓은 바닥을 빼곡히 메우고 있던 땡땡이 공작의 리플렛들. A5 크기의 색지에 실크스크린으로 ‘OOOI CRAFT’라고 커다랗게 찍어낸 리플렛들은 저마다 잉크의 색이 다르고, 찍힌 정도가 다르고, 또 마른 정도가 달랐다. 우리는 잉크가 발린 부분이 겹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줄을 맞춰 바닥에다 종이를 늘어놓았다. 호랑의 고양님 리지가 그 곁을 지날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며 ‘밟으면 안 돼!!’하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실크스크린은 호랑의 오랜 염원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워크숍을 마친 뒤, 그다음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고민할 것도 없이 실크스크린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부터 공부해야 했다. 그래서 과정이 길었다. 우리는 틀을 무엇으로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고, 뭐가 얼마만큼 필요한지를 알지 못해서 되는 대로 잔뜩 재료를 주문했다. 감광기도 직접 만들었다. 언제나처럼 인터넷이 우리의 선생이었고, 우리는 실수 연발에 의욕이 앞서는 학생이었다.

우리의 첫 작품이 좀 멋있는 거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사실 그랬었다고 우겨볼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는 제대로 기록되어야 하므로, 진실을 고백하자면, 우리의 첫 작품은 진지한 표정의 인삼이 ‘난 실크하니까' 하고 내뱉는 장면이었다. 머리에 꽃을 달고, 오동통한 다리로 짝다리를 짚은 애였다. 붉은 잉크로 찍어서 꽤 그로테스크했다. 그래도 그때는 신나는 성공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도 신나는 성공이다.


#실크스크린 #DIY #찍을수있는데는다찍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