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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손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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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quum Jun 04. 2016

삶에서 멀어진 배움

    최근 스웨덴 가구 브랜드 이케아가 우리나라에도 상륙했다. 업자 입장에서는 국내 가구업계를 초토화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부터, 소비자 입장에서는 싼값에 질 좋은 가구를 구매할 기회라는 환성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케아가 국내에 입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영된 어느 시사프로그램이 흥미로웠다. 이케아 제품은 완제품이 아니라 창고에서 반제품 상태의 제품을 사다가 소비자가 직접 조립해 완성해야하는 반제품이다. 물론 비용을 지불하고 조립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지만 난이도에 따라 인건비가 달라지기 때문에 값이 싼 의자를 완제품으로 산다면 제품 값보다 조립비용이 더 드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한다.


   이 방송에서는 가구 전문가와 일반인이 똑같은 이케아 제품을 각자 조립하는 과정을 비교해서 보여주었다. 가구 전문가는 제품에 동봉된 설명서만 보고도 쉽게 조립을 끝냈다. 반면 일반 소비자는 구조가 비교적 간단한 의자 조립엔 성공했지만, 과정이 복잡하고 부품이 많은 책꽂이나 서랍장 조립에는 애를 먹었다. 심지어 못 역할을 하는 나무 심지를 박다가 부러뜨리고, 순서를 헷갈리는 바람에 한참 조립한 서랍장을 다시 분해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미지출처 http://www.i4u.com/2015/10/95494/robots-are-just-terrible-assembling-ikea-furniture-humans

    이 프로그램 진행자는 짐짓 ‘중립적인’ 견해로 어릴 때부터 목공을 배워온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험이 드물기 때문에 단지 값이 싸다는 이유로 이런 반제품 형태의 가구가 무조건 호응을 얻을런지는 의문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어릴 적부터 목공을 경험한다? 이케아의 나라 스웨덴과 이웃해 있는 핀란드에서 지내본 경험을 떠올려본다. 과거 핀란드는 스웨덴의 통치를 받기 전까지 독자적인 국가 공동체를 이루지 않고 숲 속에서 드문드문 모여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직접 만들어 쓰는 일들을 보다 작은 단위의 공동체 안에서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현대의 핀란드인들의 손은 여전히 분주하다. 핀란드 사람들이 말하는 일년 중 가장 큰 낙은 해가 긴 여름을 나기 위한 안락한 여름별장을 꾸리고, 어둡고 추운 겨울을 건강하게 보낼 사우나를 정비하는 것이다.



    겨울이 길어 실내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기도 하고 침엽수림이 지천에 널린 환경에서 목공은 일상이 되었고 가족 중 누군가가 작업하는 모습에도 익숙하다보니 매일 사용하는 가구를 고르는 안목과 정성도 남다르다. 따라서 만드는 수고를 잘 알기에 사람이 직접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드는 일에 품삯을 깎으려하지 않고 정당한 가격을 지불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고, 스스로 만들어 쓰고 고쳐 쓰는 일도 흔하다. 이렇듯 공예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생활방식을 토대로 공예 교육 또한 발전을 거듭해왔다.


    핀란드에서 거주할 때 핀란드 예술 교육 정책 현장을 견학하고자 한국에서 온 장학사들을 도우러 헬싱키 근교의 몇몇 초등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핀란드 학교들은 도심 가까이 있더라도 대개 숲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학교마다 마련된 공작실은 우리나라 대학 시설 못지않은 수준인데, 목공용 테이블과 기계, 수공구 등을 두루 갖추었다. 가마 같은 도예 시설 또한 마련되어 있다. 공예를 가르치는 정식 교사 외에도 ‘테크니션 마스터’가 있어서 아이들의 만들기 교육을 지도하고 보조한다. 만들기를 비롯한 실기 과목을 다른 과목과 같이 중요한 비중으로 두어 교과 시간을 편성한다. 단발적 체험에만 그치는 공작이 아니라 양질의 실습 도구와 재료로 실생활에 직접 쓸 결과물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직접 만들어 쓰고 고쳐 쓰는 습관이 몸에 익는다. 초등 교육시설이 이럴진대, 대학시설에 작업실을 제대로 갖추어 놓는 것은 특별하지 않다. 어느 나라에서 어떤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른 이정표가 만들어진다.

    최근 제조자 운동 붐과 함께 핀란드에도 일반 시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3D프린터가 동네 도서관마다 보급되었다고 한다. 도서관은 사람이 오든 안 오든 기본적인 사회적 자본으로 운영되는 공공시설이다. 실적을 위해 새로운 정부 산하기관을 만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용했는지로 점수를 매기는 환경과는 질적으로 접근 방식이 다르다.


    우리가 배운 만들기 관련 수업은 어땠을까? 취학 전 아동기 때까지는 만들고 그리는 활동을 참 많이도 했었다. 그러나 제도권 교육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다. 학교 수업에서의 만들기는 이전에는 즐거운 놀이였던 만들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청소년이라면 마땅히 알아야할 잘 짜여진 교육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평가방식도 이론을 암기하여 시험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도 그 때를 추억팔이하며 시니컬한 웃음을 짓기도 한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목 중에 실(實)과가 있는데,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실제로 소용되는 것을 주로 한 교과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슷썰기, 깍둑썰기 등 써는 방법들의 명칭과 특징을 책속의 글로 배웠고, 구체적으로 가로세로 몇 센티미터로 잘라야 하는지도 암기했다.


    학교 교육에서 만들기는 실기보다는 이론에 치우치기는 했으나 요리나 재봉, 간단한 공구 다루기와 같이 나름대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술들을 다루어왔고, 요즘은 시대 변화에 맞추어 컴퓨터 활용과 전자회로 꾸미기 같은 종목도 포함한다. 어쨌든 삶과 관련된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는 기능 교과목에 가깝기는 하다. 그러나 그마저도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실습 위주 과목들은 축소된다. 수업 시간에 들어가도 수능 시험에 들어가지 않는 과목이므로 자연스럽게 자습 시간이 된다. 몸을 쓰고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은 점차 사라진다. 나이가 들수록 만들기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는 이유는 이렇듯 학창 시절에 만들기를 대부분 글로 배운 시대, 더 ‘중요한’ 다른 무언가에게 늘 뒤로 밀리는 시간이라고 여기게 한 시대가 만든 부재감에서 비롯한 것 같기도 하다. 어린아이 때는 무엇이든, 심지어 먹는 음식이나 재료도 만져보고 아무것이라도 만들어보라고 강조하지만 그런 경험은 학습 단계가 올라갈수록 뒷전이 된다.


    만들기에 대한 그리움을 더하는 것 중에는 기성품처럼 급하게 대충 찍어낸 듯한 수업용 교구의 기억도 있다. 실과 수업을 위해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구매해야 했던 국기함 만들기 교구는 재단도 부정확하고 표면도 거칠어 튀어나와 손바닥에 나뭇가시가 박히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처음 경험한 목공에 대한 첫인상이 되었다. 그때의 어설픈 경험이 ‘언젠가는 제대로 목공을 해보고 싶다’는 ‘장인의 본능’을 자극해 더 나은 재료와 공구가 주어진 지금 더 큰 만족과 성취를 선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성인이 된 후에도 만들기에 친화적이지 못한 우리의 주거환경이나 근로환경 탓에  ‘만들기는 어렵다’라는 생각을 키우게 마련이다. 학습에 대한 이미지는 이렇듯 우리들 인생에 크고 작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 교육의 문제라면 누구나 알듯이 다음 학교로, 그중에서도 더 좋은 학교로 가는 데 치중된 교육이라는 점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입시와 먼 과목들은 다 ‘잉여’가 된다. 이런 환경에서 손 노동은 어디까지나 삶의 진지한 경험이 아니라 ‘체험’ 또는 ‘취미’ 영역에 머문다. ‘공부 상처’라는 <EBS> 다큐멘터리를 통해 본 학생들은 '우리나라는 학벌사회니까 나중에 잘살려면 대학에 가야 하고,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수긍하고  있었다. 이 방송에서 한 고등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내신등급은 등수에 따라 매겨지기 때문에) 저 친구들만 없으면 더 잘 나올 텐데……’ 하는 생각도 솔직히 들어요.”


    성적이  상위급인 어떤 아이는 미술을 좋아하지만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부모가 미술을 못하게 해서 마음에 병이 들었다. 경쟁의 두려움 때문에 공부 못하는 아이든 공부 잘하는 아이든 불안하다. 우리 주변에도 종종 만들기의 문을 두드리는 청소년이나 어린이들이 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 시간, 그 경험이 좋은 대학을 가는 데 도움을 줄 스펙 중 하나가 되길 바랄 뿐, 아이가 온 인생을 걸고 그 길에 들어서거나 자기 시간의 많은 부분을 투입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혹은 성적이 좋지 않아 세부 전공을 정해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면 그것으로 안정된 직업이 되기를 바란다. 삶의 일부로서, 즐거움을 주는 행위로서 만드는 행위를 누릴 시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삶에서 아예 배제하거나, 삶의 전부로 만들기를 바란다. 부모들이라고 올바른 교육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닐 테다. ‘대한민국 교육 제도가 변하지 않는 한’이라고 전제를 달며, 자녀가 험난한 경쟁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고 소득과 지위를 보장해주는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 보신하기를 바랄 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유아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평생에 걸쳐 교육을 받는다. 이를 평생교육이라 한다. 대학 내 평생교육원들로 익숙한 이 교육이념은 사실 한 개인의 인격적 성숙과 함께 시대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사회, 경제,  문화적 발달을 위해  전 생애에 걸쳐 계속해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철학이다. 여기서 말하는 학습의 기회는 삶의 현장에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에 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배움 자체를 학교라는 기능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고 그 학교 교육은 여전히 성적이라는 성과위주에 머물러있는 것은 아닌지.


    얼마전 오랜만에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지인과 대화하다가 요즘 근황을 물었더니, ‘생존 수영’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생존 수영?”


용어부터 낯설었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가 알고 있는 수영과 무엇이 다르냐고 물었다. 그냥 바다에 나가서 수영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순간 나는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배웠던 수영이 떠올랐다.

국민학교 5학년 체육 교과서, 1980년대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순서대로 다양한 영법의 동작을 삽화와 함께 참 자세히도 배웠다. 문제는 실내 수영장도 아닌 그냥 실내, 교실에서 글로 배웠다는 점이다. 시험을 치르기 위한 수영 수업이 아닌,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한 배움이 아닌, 정말 일상과 가까운 배움을 우리 사회와 공교육에서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도 자신 있게 튜브 없이 첨벙 뛰어들고 싶어졌다.




글쓴이: 정혜린

*이 글은 2016년 11월 발간된 [손의 모험 - 스스로 만들고, 고치고, 공유하는 삶의 태도에 관하여] (릴리쿰 저, 코난북스) 원고의 일부 또는 가공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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