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손의 모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liquum Jun 09. 2016

릴리쿰을 열다

   각자 걸어온 길이 달랐던 세 사람이 릴리쿰으로 모이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재료와 도구를 펼쳐놓을 작업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공간을 빌려쓰기엔 비용이 부담스러워 엄두가 나질 않고, 같이 있으면 작업 중에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함께 쓸 만한 공간을 알아보기로 했다. 처음 생각했던 것은 그저 도자와 실크스크린을 위한 작업대 두어 개가 들어가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햇빛이 쨍한 여름날, 우리는 가격이 적당한 작업실을 찾아 이리저리 발품을 팔았다. 예상한 대로 마음에 드는 곳은 비쌌고 가격이 적당하면 좁았다. 몇 시간을 돌아본 뒤에야 겨우 가격도 면적도 적당하다 싶은 곳을 찾았다. 아니, 적당한 정도가 아니라 그만하면 훌륭했다. 월세도 저렴했고, 이 정도 크기라면 우리가 갖추려고 생각한 장비를 얼추 넣을 수 있겠다 싶었다.

   여기가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는데, 빈 건물에 깨진 유리창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무단 점유 금지’ 스티커가 붙어 있다.

   “저건 뭔가요?”

   하고 물으니 부동산 실장님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 근처 범죄율이 좀 높아요......”

   역시 이유가 다 있구나. 비싸거나, 좁거나, 우범지대라니… 그렇게 하루가 허탕이 되었다는 마음에 시무룩해져 터덜터덜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려는 길에, 부동산 실장님이 마음이 쓰였는지 ‘좀 비싸긴 하지만 괜찮은’ 곳을 굳이 보여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태원의 앤티크 가구 가게가 늘어선 거리의 복판에 있는 건물 이층이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벽돌이 떨어져 나간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간 곳에서 우리는 릴리쿰을 만났다.

 

   직전까지 주거 공간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했다. 구조가 굉장히 독특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전실치곤 꽤 넓은 공간이 먼저 보였다. 거실로 쓰였을 공간의 맞은편으로는 부엌으로 쓸 수 있는 자리도 있었다. 창도 꽤 커서 해 질 녘이면 볕이 잘 들 것 같았다. 한쪽에는 창고로 쓰던 꽤 깊은 방도 딸려 있었다. 나무로 짜 맞춘 문양이 빼곡한 거실 천장 가운데엔 촌스러운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벽 역시 나무 패널이라 주인의 취향이 꽤 고풍스러워 고집을 피운 게 아니라면 짓고 산 지 오래되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그곳은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세 배는 넓었고, 월세도 딱 그만큼 비쌌다. 집을 구하든 차를 고르든, 경험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단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다음엔 뭘 봐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이를 어찌할까. 계획보다 공간이 크다면, 그런데 마음에 든다면. 이런 곳이 필요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무모하고 대책 없이 우리는 덜컥 계약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처음에는 우리 셋을 위한 작업실로 구상했던 공간이, 그 쓰임도 목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작업실이 필요했던 이유가 이 공간의 쓰임을 고민하면서 재구성되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삶과 동떨어지지 않은, 제작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바랐고, 어떻게 하면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살짝) 충동적으로 공간을 얻어버린 것이다. 이 공간을 가지고 우리가 직접 나서서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곳이 공유지로 작동할 수 있을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될 수 있을지 상상하며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구와 기술을 공유하는 공간'을 그려보았다. 만들기에 관심과 열의가 있어도 실제로 문턱을 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도구나 장비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장비를 개인이 모두 갖추기는 어렵다. 특히 서울처럼 최소한의 주거 공간만을 확보한 채 살아야 하는 환경에서 차고를 개조한 작업실 같은 건 ‘꿈의 공간’에 가깝다. 미드나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소년 시절의 유쾌한 기억이든,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차고다. 한쪽 벽에 웬만한 수공구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여러 가수나 운동선수들이 취미가 뭐냐 물으면 자기 차를 정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를 비롯한 수많은 벤처 혹은 스타트업들이 차고에서 시작한 탄생 서사를 갖고 있다. 서울에서는 한창 성가를 올리는 마포의 연남동이나 망원동, 합정동 일대 가게들을 잘 살펴보면 단독주택의 일층 중 입구가 크게 트인 곳이 상점이나 음식점으로 바뀐 곳이 많다. 이전에 차고 혹은 창고로 썼을 공간은 임대소득의 산실이 된다. 나만의, 우리만의 작업을 위한 여유가 머물 곳은 없다.

   그러니 장비를 갖춘 공간을 찾아서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자동 기계를 갖춘 목공 공방, 오븐과 기타 장비를 갖춘 제빵 교실처럼 시설을 잘 마련해두고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에서 배우면서 만들기를 시작하기에, 그런 장비로 만드는 법을 배우기에 교육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개인이 작업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마침 우리에겐 실크스크린 도구와 재료, 3D 프린터가 한 대 있었다. 간단한 목공 장비와 툴, 도자기 작업을 할 수 있는 전기 가마와 물레는 공간을 마련하면 새로 갖추려던 중이었다. 우리의 장비 목록을 살펴보니 ‘이것들이 공유 자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 장비가 더 값지게 쓰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비록 규모는 작더라도 말이다. ‘도구를 다루는 기술도 공유하자!’ 기술의 밑천은 모자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먼저 나누고 또 꾸준히 하다 보면 만드는 삶에 동참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직접 돕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외롭지 않게 제작 문화를 누리는 공간도 상상했다. 독립 제작자로서 작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외로움이다. 많은 동료와 함께 움직이거나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몸이 힘들 때도 마음이 피로할 때도 기댈 곳이 없다. 직업으로 제작을 하다 보면 기술과 제품의 질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연마해야 한다. 다른 제작자와 경쟁도 해야 한다. 웬만큼 단단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직업이 아니더라도 만들기는 결국 혼자 해내야 하는 부분이 명료한 작업이다. ‘작업하는 시간은 태생적으로 고독하게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라면, 고독한 시간들 사이사이에 작업하는 이들끼리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면 어떨까? 같은 공간에서 따로 작업하고, 서로 간섭하면서 작용하는 관계들이 생겨나면 좋겠다.’

   세 번째 상상은 소비재가 아닌 ‘사용 가치’를 만드는 행위란 무엇인가란 고민과 이어졌다. 모든 것을 돈으로 치환하지 않고 가치 교환이라는 행위의 본질을 찾아 다르게 접근해보고 싶었다. 거래가 아닌 교환, 이런 것들이 소규모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이 될 수도 있으리라.

   장비와 기술을 공유하는 곳, 독립적으로 작업하되 관계 또한 만드는 곳, 거래가 아닌 교환이 발생하는 곳, 이런 생각들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무엇보다도 우리 세 사람 스스로 즐겁게 제작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겠구나 싶었다.

   핑퐁처럼 오고 가는 뜬구름들이 모여서 점점 하나의 형상이 되어갔다. 얼마나 잘해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해보자.

   그것이 우리가 내린 결론이자 시작이 되었다.



   새로운 활동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마음에 두었던 몇 가지 키워드 중 하나는 ‘잉여’였다. 잉여의 기본 뜻은 ‘나머지’, 관용적으로 ‘남아돈다’는 말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잉여인간’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쓸모없이 남아도는 인간’이다. 한편으로는 주위 세계나 사회와 거부 관계, 부조화 상태에 놓여 소외(疎外), 국외(局外)의 경험을 안은 인물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는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수동적 인간형을 잉여인간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잉여인간은 주로 고용 불안과 빈부 격차, 극심한 경쟁에 밀려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만년 취업 준비생, 무기력한 88만 원 세대, 조기 퇴직자 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21세기의 신자유주의가 이러한 ‘신 잉여인간’을 만들어낸다고 비판한다. 언젠가부터 인터넷 안에서도 자조 섞인 푸념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 잉여야’ 같은 표현에는 나의 쓸모를 발견하거나 활용해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한숨, 자조가 깔려 있다.

   하지만 잉여에 대한 생각을 뒤집는 사람들도 있다. ‘잉여롭기’ 때문에 일 대신 공상을, 여행을, 창작을 할 수 있다. 해야 하는 것,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임금을 받기 위한 노동이 아닌 개인이 원하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생계에 얽매이지 않는 잉여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고용 상태에 있거나 조직에 속한 이들에게 주체적으로 ‘잉여력’을 발산할 시간과 에너지는 절대적으로 모자라다.

   릴리쿰(reliquum)은 ‘나머지’라는 뜻의 라틴어다. 모든 사회의 산업 구조와 노동 문제는 ‘남는 것’ 들을 어떻게 다루는가와 연결되어 있기에 ‘나머지’는 그저 나머지가 아니다. 우리는 ‘잉여인간’을 소외된 실패자가 아니라 자조를 승화해 일상의 여유를 즐기고 놀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보고자 했다. 낙오자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다. 밀려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남은 자들, 삶의 낭만을 위해 남겨두는 자들이다. 그게 바로 우리였다. 우리는 그렇게 잉여, 릴리쿰으로 우리를 정의했다.

   이태원에 제작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주변에 전하자, 뭘 하려는 곳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우리는 우선 두 문장으로 릴리쿰을 소개했다.

릴리쿰은 ‘만들기’를 새로운 삶의 방법으로 취하여
환경과 일상을 복원하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바느질부터 3D 프린팅까지, 모든 분야의 제작 활동을 아우르는
아담한 공방이자 실험의 장입니다.




글쓴이: 선윤아

*이 글은 2016년 11월 발간된 [손의 모험 - 스스로 만들고, 고치고, 공유하는 삶의 태도에 관하여] (릴리쿰 저, 코난북스) 원고의 일부 또는 가공물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