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실패 2013년 9월호
우리가 ‘릴리쿰’으로 모이게 된 건 재료와 도구들을 펼쳐놓을 작업실이 필요해서였다. 처음에 생각한 건 그저 도자와 실크스크린을 위한 작업대 두어 개가 들어가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햇빛도 쨍했던 여름날 우리는 무작정 이리저리 가격이 적당한 공간을 찾아 발품을 팔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마음에 드는 곳은 너무 비싸고 가격이 적당하면 너무 좁았다. 몇 시간을 돌아본 뒤에야 가격도, 면적도 적당하다 싶은 곳을 한 군데 찾은 듯싶었다. 여기라면 괜찮겠다는 얘길 하면서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는데, 빈 건물에 깨진 유리창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무단점유 금지’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저건 뭔가요?” 하고 물으니 부동산 실장님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 근처 범죄율이 좀 높아요......” 아아, 역시 이유가 있었구나. 비싸거나, 좁거나, 우범지대라니… 하루 종일 허탕을 친 것에 시무룩해져 터덜터덜 지하철 역 쪽으로 돌아오는데 실장 역시 마음이 쓰였는지 ‘좀 비싸긴 하지만 괜찮은’ 곳을 굳이 보여주겠다고 한다.
앤티크 가구 가게가 늘어선 거리의 중앙에 있는 건물의 2층이었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벽돌이 떨어져 나간 좁다란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공간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세 배는 넓었고, 월세도 딱 그만큼 비쌌다. 하지만 무언가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게 충동적으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튿날 우리는 이태원의 한 부동산에 앉아 계획보다 세 배 비싼 월세의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처음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공간, ‘릴리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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