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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손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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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quum Jun 20. 2016

땡땡이를 공작하다

1.

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논다


   고등학교 때 자율학습을 빠지고 친구들과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거나, 하다못해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교문 앞 떡볶이를 사 먹으러 나가던, 이런 땡땡이 좀 치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이런 기억들은 단순히 그때 참 즐거웠지 하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이상으로 나름의 자유를 탐닉했던 꽤 짜릿한 경험이다. 땡땡이는 일종의 일탈이다. 일탈은 ‘자율적 놀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반복되는 일상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서 벗어나 무엇이 더 필요한지 환기시킨다.

   2011년, 쓸모와 상관없이 ‘만들면서 노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처음 시작은 좀 다른 것이었다. 사회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고 문제 해결 방법을 제안하는 소셜 디자인 그룹을 만들자는 취지로 12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한 달에 한두 번 모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몇 개월 동안 나름 의미 있는 뜬구름을 잡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러다 모임이 흐지부지해졌다. 결국엔 네 사람이 남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사회에 필요한 것 이전에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지 터놓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모임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길 원하는가?”

   무겁지만 단순한 이 질문을 거듭한 끝에 모인 답은 ‘놀이’와 ‘스스로 만들기’였다.

   우리는 우리의 상태가 ‘놀이의 부재’라고 진단했다. 왜 우리의 노동은 이렇게 힘들까? 예술가처럼 살고 싶지만 생계를 위한 노동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현실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왜 우리는 좀 더 잘 놀 수 없을까? 노는 것이 일이 되거나 일이 놀이가 될 수는 없을까? 금기처럼 느껴지거나 현실 도피처럼 한심한 생각이라고 핀잔을 들을 만한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솔직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놀지 않고 일만 하면 바보가 된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인간의 삶에 ‘놀이’라는 요소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여기서 ‘논다’는 말은 일하지 않는 상태, 단지 몸이 쉬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의 추구를 본질로 하는 자발적인 행동 또는 몰입 행위를 뜻한다. 놀이가 중요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놀이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인류를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에 대한 폭넓은 사유를 펼쳤다. 그는 인류의 모든 문화에 놀이의 요소와 형식이 있다고 보았다. 놀이가 법률, 시, 철학, 예술, 정치 같은 문명으로 구체화되었음을 논증한다. 그가 지적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공동 노동이 주로 이루어졌던 농경 사회에서는 일과 놀이가 함께 어우러지곤 했다는 점이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자본가들이 노동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일터에서 놀이의 요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규격화된 제품을 만드는 공장의 생산 속도를 높이려면 일하는 사람들이 신명 날 필요가 없다. 아니 노동자가 신명이 나든 울상을 짓고 일하든 경영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노동자의 손이 정확한가 정확하지 않은가, 빠른가 느린가, 이것만이 고려 대상이 된다. 그렇게 놀이는 일과 생활로부터 철저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동물도 인간도 놀면서 자연스럽게 생명 에너지를 발산한다. 놀이는 인간에게 가장 자유로운 행위다. 우리에게는 더 질 좋은 놀이를 즐길 권리가 있지 않을까? 삶을 더 아름답고 자유롭게 하는 놀이의 가치를 회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좀 더 당당하게 우리 사회에 이런 ‘놀이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 사람 다 창작하고 싶어 하고, 손으로 직접 만드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떤 놀이가 필요한 지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만든다는 것’은 폭넓은 의미로 보자면 인간 행위의 본질이다.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본질이라는 면에서 그렇다면 만들기와 놀이는 동의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만들기 또는 제작이라고 하면 대개 지나치게 진지 해지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 더 나은 생활 조건을 만드는 것, 더 지속 가능한 것을 설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디자인을 하자고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진 이유도 결국 너무 진지하고 어렵게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만들기는 바로 ‘놀이로서 만들기’ 일 것이다. 만드는 행위에 담긴 본연의 속성, 즉 만드는 기쁨을 즐기는 만들기 말이다.

   그렇게 우리 활동명은 ‘땡땡이공작’이 되었다. ‘놀면서 만든다’ 동시에 ‘놀이를 공작한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았다. 만들면서 놀고, 이 활동으로 자립하는 방법이 되는 사례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노동 중심 구조에 갇힌 삶에서 탈출하기, 쓸데없는 생산에 몰두하기. 각자 미션을 가지고 놀면서, 무엇이 될지 모르는 놀이 경험을 대안적인 업으로 연결하는 실험을 펼쳐보자는 무모하고도 희미한 결의를 다졌다.

   전략도 경험도 없이 무작정 시작된 실험이었다. 실행 계획은 첫째 해본 적 없는 작업을 기획한다, 둘째 직접 만들어보면서 논다, 셋째 사람들을 초대해 같이 놀아본다, 이것이 전부였다. 좌충우돌하면서 준비한 첫 번째 워크숍은 레고와 간단한 전자회로를 결합하는 만들기였다. 워크숍 첫날, 진행은 어설펐지만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성인들이 모여 레고와 LED를 만지작거리며 즐겁게 놀았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 생각이 틀리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여러 가지 제작 기술과 놀이를 결합하는 DIY 워크숍을 시도하는, 땡땡이 종족 찾기 또는 종족 번식을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2.

쓸데없는 것의 힘을 안다

땡땡이 선언

첫째, 우리는 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논다.
둘째, 우리는 쓸데없는 것의 힘을 안다.

  

   활동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나름의 선언문을 써보기로 했다. 땡땡이공작 활동의 목적과 의미를 압축한 두 가지 메시지를 ‘땡땡이 선언’에 담았다. 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논다는 것은 땡땡이공작이 만들어진 과정 자체였으므로 여기서는 두 번째 선언에 언급한 ‘쓸데없는 것의 힘’ 얘기를 덧붙이려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쓸데없지만 고퀄이다”, 더 줄여서 “쓸고퀄”이라는 표현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누리꾼들은 특별한 소용, 목적이 없거나 혹은 그에 비해 과하게 정교하거나 완성도 있는 무언가를 만든 결과물을 봤을 때 이런 표현을 ‘찬사’로 쓰곤 한다. 인터넷 놀이 문화 중 하나인 정교한 이미지 합성이나 패러디 제작은 대체로 이런 ‘쓸고퀄’을 지향한다. 그 연장선에 있는 맥락에서 ‘덕력’, ‘잉여력’이라는 말을 쓴다. 장난스럽게 느껴지는 이 은어들은 현세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덕력’은 일본의 ‘오타쿠’를 우리말처럼 변환한 ‘오덕후’에서 파생된 은어다. 70년대 일본에서 나타난 ‘오타쿠’는 애니메이션 등을 즐기는 독특한 문화를 가진 팬층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런데 오타쿠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보여주는 비범한 몰입도, 창의력이 그 분야의 생산적인 변화를 만드는 원동력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이제는 좋아하는 어떤 사물이나 존재, 분야에 심취하여 집요한 탐구 능력을 펼치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으로 폭넓은 영역에 쓰이는 말이 되었다. ‘한 우물을 판다’는 표현처럼 덕후들은 자기 영역의 깊은 세계로 몰입한다. 덕력이 높을수록 어떤 분야에 할애한 시간이 많고 그만큼 지식도 경험도 많기 때문에, 잠재적인 능력이나 소양을 가리키는 말로 나아갔다.

   ‘잉여력’은 남아도는 시간과 에너지의 분량을 말함과 동시에 이것들을 활용하는 능력을 내포하기도 한다. 놀이의 근원이 남아도는 생명 에너지를 발산하는 행위라고 해석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쓸데없는 것을 지향하는 잉여력은 ‘놀이’의 진정한 의미, 본질을 추구하는 본능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잉여력과 덕력을 제대로 발산해보자는 생각에서 우리도 프로그램을 벌였다. ‘야매 공작’이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 <비 카인드 리와인드(Be kind rewind)>를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은 어느 날 친구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의 비디오테이프를 다 지워 못 쓰게 만드는 사고를 친다. 그리고 이 사고를 수습하겠다고 직접 소품과 의상을 만들어 영화 장면들을 허접하지만 나름 그럴듯하게 재현해 가짜 영화들을 찍은 다음, 손님들에게 버젓이 대여한다. <고스트 버스터즈>를 시작으로 다양한 영화들을 찍어서 가짜 비디오를 대여하는 데 재미를 붙인다. 심지어 이 비디오들은 지역민들 사이에서 흥행하기에 이른다. 미셸 공드리의 작품들은 화려한 촬영 기법이나 CG 대신 손맛 나는 ‘크라프트’ 장치가 많다는 특징이 매력이다. ‘야매’지만 소시민들이 DIY로 원본보다 더 재기 발랄하게 영화를 만들어내는 영화 속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도 직접 워크숍을 열어 영화를 찍자!’

   야매는 무자격자라는 뜻이다. 야매 공작은 어린 시절 집에 돌아다니는 한약방 이름이 적힌 보자기를 어깨에 둘러 슈퍼맨이 되거나, 나뭇잎에 흙과 돌멩이를 가지고 만찬을 차려내던 소꿉놀이처럼, 주변의 허섭스레기들을 모아 무용한 것들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우린 제주도를 영화의 배경으로 정하고 ‘허접 허섭 구멍가게 블록버스터 제작’을 목표로 이런 쓸데없는 놀이에 응해줄 사람들을 모집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였다.

   박찬욱 감독을 좋아한다는 영화학도,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자발적 임시 백수로 열심히 노는 중인 연기 경력이 있는 바리스타, 부산에서 여행 온 요트 제작자, 영화 만들기가 아니라 스태프 뒷바라지를 위해 참여한 듯 현지 스태프 수준으로 도움을 준 달수군 카페의 달수군, 야매 공작을 위해 서울에서 제주까지 내려온 모델 걸음의 현장 체질 기획자, 생애 두 번째 영화 연출에 나선 카나리 픽쳐스 대표 까나리 존스와 특수효과 기술 지원을 위해 섭외한 기계공학자 성수님, 여행 중에 즉석으로 합류한 분당 장어 가게 실장님까지.

   우리는 쓸데없는 생산에 비범한 감각을 지닌 이들과 아름다운 제주 바다 앞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제주 막걸리에 섞어 마시면서 1박 2일 동안 우리의 잉여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데 집중했다. SF 고전 <고스트 버스터즈> 장면들을 ‘야매 영화’로 재탄생시키려고 들인 공은 굉장했다. 소품을 만들 재료를 확보하려고 고물상에 가서 쓸 만한 재료들을 뒤지고, 태풍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촬영 장소를 헌팅하려고 제주도를 반 바퀴 넘게 돌았다. 레고 블록으로 유령에게 습격당한 도시를 세웠다. 농약 뿌리는 통과 제습제 망, 과자 상자를 꾸며서 영화 속 ‘고스트 버스터즈’의 장비들을 만들었다. 유니폼은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앞치마, 유령 잡는 트랩은 은박지 씌운 상자였다. 먹깨비 유령은 초록색 풍선에 얼굴을 그려 넣어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품과 우스꽝스러운 의상을 몸에 걸치고 진지하게 촬영에 임하다가도, 다들 키득키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 노을이 막 물들기 시작하는 협재 해변에서 하얀 셔츠를 뒤집어쓴 유령이 냅다 달리면 이상한 옷차림을 한 무리가 유령을 잡으러 여행자들 사이를 파고들며 신나게 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카메라를 든 땡땡이들이 쫓아갔다. 육지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웃음이 뒤섞였다. 한 차례 광풍 같은 웃음이 지나가고 난 뒤, 물이 빠진 해변의 축축한 모래밭을 함께 걸었다. 바다를 뒤덮은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쓸데없음에 열광하고 있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곱씹고 기억하게 될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갓난아이가 보여주는 의미를 알기 힘든 몸짓, 표현들이 무슨 뜻인지 해석되지 않아도 몸짓과 웃음 또는 울음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 어린아이가 노는 데 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아이는 자랄수록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합리성과 목적성을 기준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받는다. 어른이 되면 ‘무목적성’, 쓸데없음은 비생산적이라고 여긴다. 비생산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우리에게 일을 잘 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잘 빈둥거리는 것 또한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스 시대의 자유민에게 빈둥거리는 것은 일하는 것보다 나은 행위였으며 그 자체가 모든 일의 목적이었다. 우리는 이런 가치관을 따라선 생존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지만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놀이의 즐거움을 찾아내려고 한다.

   땡땡이공작이 지향하는 놀이의 즐거움은 소비 활동으로 편리하게 얻어지지 않는다. 하위징아는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놀이 정신이 깃들게 된다고 했다. 쓸데없는 것에 주목하거나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는 시간, 정신과 두 손을 자유롭게 움직여 무언가를 만드는 시간은 우리에게 최고의 빈둥거림이 되어줄 수 있다.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있는 ‘놀이'의 가치를 되살리는 것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 그리고 보다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으로 연결된다. 누구에게나 스스로 놀이의 방법을 발견하는 잉여 짓, 자기 자신을 깨우는 놀이가 필요하다.  





글쓴이: 선윤아

*이 글은 2016년 11월 발간된 [손의 모험 - 스스로 만들고, 고치고, 공유하는 삶의 태도에 관하여] (릴리쿰 저, 코난북스) 원고의 일부 또는 가공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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