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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quum Apr 30. 2019

미끄덩하게 발라당

*이 글은 하자센터에서 2018년 4월 발간한 책 [노 답! 노는게 답! No Answer Book]에 기고했던 원고를 옮긴 것입니다. 


‘실패해도 좋다’는 말은 어쩐지 늘 거짓 같다. 진심이든, 호의이든 실패해 넘어져 있는 사람에겐 같은 처지에 있지 않은 사람이 던지는 입바른 위로로 느껴진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어떤가. 그조차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는 전제하에 지금은 실패하는 걸 참아주겠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렇듯 실패는 사람을 의기소침하고 위축되게, 그리고 위로조차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삐딱이로 만든다. 실패를 딛고 성공하셨다고요? 축하를 보냅니다. 저와는 다르게 난사람이시네요. 그렇게. 가끔 의문이 든다. 과연 진심으로 실패하는 것을 환영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작년 봄, 릴리쿰이 하자센터와 함께 ‘움직이는 창의 놀이터’라는 공공 팝업 놀이터를 만들어 보기로 하고 열었던 우리의 첫 놀이터는 성황리에 치뤄져 역대 최고의 참여자수를 갱신했지만, 우리에게는 대실패의 기록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거대한 산을 만난 셈이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산인지 작은 언덕인지 판단할 능력조차 없었다. 운영에서 실패할 확률을 줄이고자 계획했던 많은 것들은 예상보다 훨씬 많이 몰려들었던 사람들 앞에선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고, 못 하나조차 마음대로 박을 수 없는 시청광장이라는 공간 역시 우리의 손을 꽁꽁 묶는 제약 조건이 되었으며, 체험 학습과 서비스에 익숙한 대중들은 우리의 기대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잘하고자 했던 마음은 그저 무용하기만 했다. 결국, 순진하게 그렸던 ‘다 함께 즐거운’ 놀이터는 외마디 비명만 남긴 채 내내 휘청이다 끝이 나 버렸다.


따가운 5월의 햇빛 아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발갛게 탄 팔이 가라앉아 까맣게 자리 잡을 즈음, 그 실패를 곱씹으며 생각한 것은 결국은 놀이터를 잘 만들어 내려고 노력할수록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시스템을 잘 만들어보려 할수록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만 요소가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놀이터는 잘 기능하는 놀이터는 아니었다. 놀이터 작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도, 그 일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잘 해낼 수 있어서라기보다, 우리라면 즐겁게 잘 놀아 볼 수 있으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놀이’는 릴리쿰의 시작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노동에 치여 사는 삶에 익숙해져 가는 평범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두려웠던 멤버들이 자신의 삶에서 놀이를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땡땡이 공작’ 활동이 릴리쿰의 전신이다. 그 활동을 시작으로 우리는 제작하고 놀이하는 실험을 우리의 노동으로, 작업이자 행위로 삼아 왔다. 그러니까 뭐랄까, 닥치는 대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 즐거운 일들을 발견하고 수행해 온 셈이다. 그런 우리가 만드는 놀이터라면 놀이터를 만드는 사람도 함께 즐거운 놀이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원했던 놀이터가 아닐까. 

그 고민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다시 던질 기회를 얻었다.


놀이터를 여는 건 왜 중요할까.

시민들이 놀이터를 어떻게 대하길 바라나.

놀이터가 정말 공공의 지대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오랫동안 고민을 해봐도 그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바로 찾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연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규칙이 정해진 스포츠와 달리 놀이는 예측할 수 없다. 놀다보면 정해진 조건이 바뀌고, 그 형태는 달라진다. 캣타워를 사주면 상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놀이는 주목하지 않았던 것에서 즐거움을 찾아내고 그 기능을 바꿔버린다. 그것이 놀이라면 차라리 한 번 제대로 망쳐보는 건 어떨까. 체험학습이 아닌 진짜 놀이가 벌어질 수도 있는 그런 모험을 해 볼 수 있다면 어떨까. 


그래서 우리는 실패하는 놀이터, 

우리가 알던 모든 규칙이 ‘미끄덩’하고 넘어지는 놀이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유연하게 흘러가다 자빠지기도 하는 놀이터. 


놀이를 규정하고, 이렇게 놀면 된다고 알려주는 놀이터가 아닌 

어린이들이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놀이를 창조해 낼 수 있고, 

그 놀이가 유연하게 흘러가는 놀이터.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질문을 던지는 놀이터, 

놀이 문화의 정형화를 경계하는 놀이터, 

놀이의 발견에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놀이터다.


우리의 계획에서, 서비스 요원 취급받던 안내 요원을 없앴다. 놀이터 설명서를 없앴다. 좋은 뜻이었지만 몰려들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결국 형식적인 절차가 되어버린 입장 약속을 없애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이걸 하고 노는 거예요’하고 한정 짓던 표지판을 없앴다. 대신 그 빈자리에 우리의 메시지를 담기로 했다. 놀이터에 온 이상 절대로 못 보고 지나칠 수 없을 커다란 현수막에 ‘놀이터가 붐벼도 다 같이 즐겁게 놀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묻지 않고도 놀이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자. 그냥 휙 지나가지 못하도록 입장 동선을 미로로 만들고 그 곳곳에 ‘노는 물에는 위아래가 없다!’, ‘어른 입장 불가, 어른이 입장 가능’, ‘놀아야 놀이터가 되는 놀이터!’와 같이 우리가 어린이와 어른들, 모두에게 바라는 놀이터 안에서의 태도를 큼직하게 걸어두자. 놀이터의 트인 공간에는 대형 주사위에 시민들을 향한 질문들을 심어 놓자.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설명적이지 않게, 보다 시각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시도였다. 그런 질문과 선언을 통해 놀이에서는 언제나 관리자 또는 주변인이 되어 버리는 어른들의 참여와 자발성을 호출하고, 어린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발견하도록 열려 있는 놀이터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운영진에서 정한 놀이터 주제를 놀이 작가들에게 전달하고, 그에 맞춘 놀이나 만들기를 계획해 달라 요청했던 기존의 방식도 버렸다. 새로운 요청은 저마다 자유롭게 작은 놀이터를 펼쳐달라는 것이었다. 작가들에게 ‘놀이터 속 작은 놀이터’라는 구성으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것으로 놀이판을 벌이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켜보는 사람, 혹은 함께 노는 사람으로 있어 달라 했다. 작가들 자신도 즐겁게 놀 수 있는 놀이터이길 바란다고도 했고, 그렇게 열린 놀이판들이 서로 엮이고, 또 함께 흘러가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상상도 전했다. 작가들도 이런 시도에 흔쾌히 화답해주었다.


그렇게 꼴을 바꾼 놀이터가 처음으로 열린 것은 5월 5일, 작년 가열찬 실패를 겪었던 날과 같은 날이었다. 이번에는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렸다. 너른 잔디밭과 충분한 그늘, 시청광장에 비교하면 훨씬 좋은 조건이었지만, 수많은 기관과 사람이 엮여 진행되는 일이 그리 순순할 리 없다. 늘 그랬듯 준비단계부터 크고 작은 실수가 있었고, 미처 확인하지 못한 문제들은 가장 곤란한 순간에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물을 쓰는 놀이인데 수도를 쓰지 못해서 그걸 해결하기 위해 동동거리며 뛰어다니다 지쳐서 한쪽 구석에 철퍼덕 앉아 바라본 놀이터는 ‘혼돈과 카오스’ 그 자체였다.  


한쪽에선 신문지가 날아다니고, 물을 흘려보내는 용도의 수로엔 어쩐지 아이들이 다리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친구들과 함께 걸어보라 만든 놀잇감은 한쪽만 골라 두 발을 모으고 통통 뛰는 용도가 되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처럼 센서에 들키지 않고 지나야 하는 통로는 들키면 비눗방울이 나오는 쪽이 더 즐거웠던 탓에 신나게 뱅뱅 도는 곳이 되었고, 쌓으며 놀라고 두긴 했지만 바벨탑의 재현을 노리나 싶을 정도로 우유박스를 쌓아 올리는 건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침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던 우유상자탑이 쓰러졌고, 그걸 쌓던 아이들은 웃음 섞인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고 뒤로 피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공기 중에 반짝반짝 피어올랐다. (먼지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금세 또 달려들어 우유박스를 쌓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제 키보다 높이 쌓는 것보단 무너지는 순간을 위한 것이었을테다. 


그 뒤죽박죽 ‘미끄덩한’ 풍경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 일을 시작하며 그렸던 놀이터에 훨씬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있었다. 진심으로 실패하는 것을 환영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 말이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면, 우리는 금새 답을 발견할 수 있다. 실패를 즐길 수 있는 사람. ‘어린이’라는 사람이다.


놀이터가 미끄덩하고 발라당하면서 거듭되는 동안 우리는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거듭되는 실패의 찰나에 번지는 웃음이 가득했던 그 날의 공기 속으로 스며 들어간 우리의 질문들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또 하고 있을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2017년 펼쳐졌던 ‘놀이터가 미끄덩’, 그리고 ‘놀이터가 발라당’은 진정 새로운 출발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놀이터를 함께 기획하는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다함께 실패를 향한 공을 쏘아 올려볼 수 있었다. 그 공이 어디까지 공기의 저항을 뚫고 올라갔을는지, 언젠가 그 괘적이 보일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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