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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quum Nov 24. 2019

놀이해부도감: ② 비눗방울 놀이

놀이를 파헤치고 해킹해 보는 놀이 해부 도감


엉뚱한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지구 반대편 나라의 신화나 민담을 모은 책을 읽다 보면 ‘엇, 이거 꽤나 익숙한데?’ 싶은 이야기와 마주칠 때가 있다. 우리 아버지는 밥을 세 그릇도, 다섯 그릇도, 열 그릇도 먹는다 자랑하는 어린애들처럼 자신들의 조상은 곰이나 늑대, 용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건국신화나 인간의 타락에 분노한 신이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렸으나 아주 착했던 자신의 조상만은 구원해주었다고 하는 이야기 같은 것. 그런 유사점은 그들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이, 우리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과 같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함께 옛이야기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각각 다른 대륙일지언정 유사한 환경 조건에서 모여 살던 인간들이 비슷한 경험에 비슷 한 심리적 대응을 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혹은, 어쩌면, 우리가 그저 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적 없는가? 어릴 때, 딱히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의 부모님이 친부모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한 적. 그 이유가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다른 아이와 뒤바뀌어서든 슈퍼맨처럼 다른 세상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든 말이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거나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자신은 실은 초능력자라서 언젠가 세상을 구할 날이 올 거라는 기대를 한 적은? 나는 꽤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해왔고, 그런 사람이 나뿐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시기를 거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안도하고, 또 씁쓸해했던 기억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니까 어떤 환경에서 자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떠올리곤 하는 것이라면, 그건 인간의 의식 속 어딘가에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연결되어 있는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도 모르는 새 온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상상창고 같은 곳 말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곳이 있다면 거기에 담겨있는 게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곳에는 ‘문화는 달라도 다들 비슷하게 사는구나’ 생각하게 했던 모든 것들이 존재할 것이다. 유사한 속담, 유사한 편견, 유사한 풍습. 어쩌면 요리 방법이나 호오(好惡), 윤리의 기준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확신할 수 있는 건 분명 거기에 ‘놀이’도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렇다. 요즘 같았으면 분명 어느 한쪽은 표절 시비에 걸리고 ‘원조‘가 어디인지를 따졌을 유사 설화 같은 것은 놀이의 영역에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물수제비 같은 것. 물수제비는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무조건 많이 튀기는 쪽이 이기는 거라는 단순한 규칙이 달라지지도 않은 채 지금까지도 여러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다. 심지어 2004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크리스토프 클라넷(Christophe Clanet)이 어떤 형태의 돌을 쓰고, 어떤 각도로 던져야 그 승부에서 유리한지를 연구해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동지애를 느낀다. 존경스럽다.


Christophe Clanet이 다양한 변수에 따라 돌이 튀는 것을 기록한 연구 자료


땅따먹기는 또 어떤가. 어떤 학자들은 그 놀이가 초기 로마 제국 시절, 군사들이 훈련하던 모습을 아이들이 모방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학자는 기원전 2357년 이미 중국에서 문자로 남겨진 기록이 있다고 주장하며,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무덤에 땅따먹기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느 쪽이 최초이든 간에 그 놀이가 위에서 언급된 나라들 외에도 우리나라를 포함해 인도와 가나,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이미 오래전부터 퍼져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것을 고려하면 땅따먹기 역시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린’ 미지의 공간에서 튀어나왔다고 추측하는 게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숨바꼭질도 있다. 술래가 눈을 가린 채 100까지 세는지, 자기 나이만큼 세는지, 혹은 정해진 노래를 하는지, 약속한 문구를 되뇌는지, 지역마다 세부적인 규칙은 다르지만 사람들은 숨고, 술래는 찾는다는 원형만큼은 원시시대부터 그대로다.


이렇게 거창하게 놀이해부도감의 두 번째 꼭지를 시작하는 것은 그 목록에 추가하고 싶은, 혹은 추가해 마땅한 또 다른 놀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비눗방울이다.




비눗방울, 놀이?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놀이’는 이렇게 네 가지로 정의된다.


1. 여러 사람이 모여서 즐겁게 노는 일. 또는 그런 활동
2. 굿, 풍물, 인형극 따위의 우리나라 전통적인 연희를 통틀어 이르는 말
3. 일정한 규칙 또는 방법에 따라 노는 일
4. (일부 명사 뒤에 붙어) ‘모방을 하거나 흉내를 내면서 노는 일’의 뜻을 나타내는 말

하지만 비눗방울 놀이에는 동료가 굳이 필요하지 않으며 - 그들은 ‘내’ 비누액을 축낼 경쟁자일 뿐이다 - 규칙도 없다. 편의상 선호되는 것이 있을 뿐 어떤 도구를 써야 한다는 약속도 없고, 누가 한 번에 많은 개수의 방울을 만들어내는지를 겨루지도 않는다. 그저 비누막이 맺히는 도구를 비누 용액에 담갔다가 뺀 뒤 바람을 이용해 방울을 만들어 날리는 게 전부다. 도구가 없다면 손을 쓸 수도 있다. OK 사인을 보내듯 손가락을 둥글게 말고 비누액에 담그면 거기에도 비누막은 맺힌다. 남은 일은 그걸 입 앞에 갖다 댄 뒤 입술을 모으고 살살 입김을 부는 것뿐이다.


그러니 표준국어대사전을 편찬한 국립국어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비눗방울 놀이’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 없다. ‘비눗방울’ 뒤에 ‘놀이’를 붙이는 건 ‘자전거’에 ‘물고기’를 붙이는 것만큼이나 논리에 어긋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 정말로 안 되는 걸까? 어차피 그 사전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페미니스트’를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 따위로 정의하고 있지 않았나. 게다가 그 문구는 수많은 항의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비유적’이라는 궁색한 수식어를 단 채 여전히 사전에 남아있다. 그 말인즉슨, 어차피 표준국어대사전은 새로운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 느리고, 잘못을 수정하는 일에 옹색하니 굳이 지금 당장의 정의를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자, 이 말에 설득이 되었다면, 각자 자신의 놀이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보고, 펜을 들어 4번 아래에 추가하도록 하자. 나는 ‘5.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모든 행위’라고 적겠다.


좋다. 

이것으로 마음이 개운해졌으니 이제 비눗방울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우리는 모두 적어도 한 때, 비눗방울의 찬미자였다.


서두에서 이미 온갖 논리적 비약과 성급한 일반화를 저질렀으므로, 함부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단언하자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분명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빨대의 한쪽을 2, 3cm가량 가늘게 조각내어 꽃잎처럼 활짝 펼치고, 세제를 탄 비누 용액에 담갔다가 후- 불고선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투명한 비눗방울을 지켜본 경험 말이다. 그 비눗방울은 그날의 바람 상태나 온도, 습도, 그리고 당신이 물에 세제를 얼마나 탔는지에 따라 하늘 높이 오르기도 하고, 흐물흐물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금세 맥없이 팝-하고 터져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던 터지기 전까지는 둥실둥실 움직이면서 마치 무지개처럼 여러 가지 색으로 번들거렸을 것이다. 당신은 (나 역시 그랬듯) 거기에 넋을 잃었을 것이고.


서두를 통해 짐작했겠지만, 그렇게 넋을 잃었던 사람들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공기를 가두어 방울로 만드는 액체를 비누액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공기를 눈에 보이는 구형으로 만들며 노는 행위의 시작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혹은 그렇게 추측된다.


영국의 물리학자로, 신중하고 혁신적인 실험 기법으로 유명한 찰스 버논 보이즈 (Charles Vernon Boys) 경은 ‘비눗방울: 그 색과 그 형태를 이루는 힘에 관하여’라는 책의 서론에서 조셉 플라토 (Joseph Plateau)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비눗방울의 기원에 관한 확인되지 않은 제삼자의 증언을 재인용한다. 그 내용은 프랑스의 작가인 헨리 버소드 (henry berthoud)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한 아이가 공기방울을 불며 노는 그림이 그려진 고대 에트루리아의 꽃병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보이즈는 짐짓 중립적인 척 그 증언의 진위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덧붙이지만, 그 이후 이어진 내용으로 보아선 신뢰하는 쪽으로 좀 더 기울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Sir Charles Vernon Boys. Photograph by Lafayette, 1935. Credit : Wellcome Collection.
Soap Bubbles 책 내지



그 확신은 나 역시도 가지고 있다. 지금과 형태는 달랐다고 하나 알칼리 성분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비누의 제조 방법이 기록된 것이 기원 2200년 전이니 비눗방울 놀이 역시 그때 시작되었다고 본다 한들 썩 무리한 추측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지만 만약 보다 확실한 유형(有形)의 증거를 요구받는다면, 나는 구차하게도 3, 4천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난 뒤의 작품을 내세울 것이다. 바로 쾰른 시토 수도원 회랑의 스테인드글라스이다.


Cloister of the Cistercian Monastery, Altenberg, Cologne, c. 1530


이 그림은 1530년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의미는 인간의 존재가 비눗방울과 다름없이 덧없다는 것이라 한다. 엄숙한 종교의 탓인지 비눗방울은 한동안 그와 같은 의미의 메타포로 즐겨 사용되었다.


Raphael Sadeler I (1590)


Hendrick Goltzius (1594)


Jacques de Gheyn II (1603)


(그만 알아보자...)


그렇다면 사람들이 종교적인 엄숙함을 떠나 비눗방울을 만드는 것이 즐겁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언제일까.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결국 그것을 인정하긴 한 것 같다. 이것은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찰스 버논 보이즈 (Charles Vernon Boys) 경의 책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중 비눗방울을 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그리고 비눗방울의 경이로운 색상과 완벽한 형태에 경탄하며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를 이다지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지 궁금해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들 중 누구도 비눗방울을 가지고 노는 것에 지루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 평범한 비눗방울에는 그것을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담겨있고, 나는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알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신중한’ 과학자라는 후세의 평가와는 어울리지 않게 매우 열광적인 선언이다.


그는 비눗방울에 매혹되었던 게 틀림없다. 우리 역시 그러했듯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이 사람, 혹시 과학자가 아니라 비눗방울 덕후인가?’ 의심이 들 때 즈음 그는 다음 장에서 액체의 표면이 가진 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순수한 즐거움이 진지한 탐구로 이어지는 시점이다.


이제 우리도 과학을 이야기해보자


내가 어릴 때 비눗방울 용액을 제조한 방식은 매우 단순했다. 바가지 하나에 물, 설거지용 세제만 있으면 되었다. 물과 세제의 비율에 대해서는 딱히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비눗방울이 잘 안 생기면 세제를 붓고, 더 붓고, 더 부었다. 어째서 물을 더 부을 생각을 못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그런 식이었고 그럭저럭 성공해 왔다. 그러면 된 거지. 나는 생각했지만, 그 ‘그럭저럭 제조 방식’은 수많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비눗방울 놀이를 해야 하는 임무를 맞이하면서 처절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실패담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아이들은 가만히 비눗방울을 불기보단 도구를 공기 중에서 휘둘러 대는 것에 더 재미를 느꼈고, 그 결과 인터넷으로 구매한 용액은 금세 동났다. 근처 약국과 슈퍼마켓에서 재료를 사 와 비누용액을 급조했지만, 그것은 물과 다를 게 없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비눗방울이 생기지 않자 제 차례를 기다리다 겨우 놀이에 뛰어든 아이들은 낙담했고, 나는 낙심했다.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고, 인터넷에서 찾은 방법을 모방해보았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의 성공 사례가 왜 나에겐 도움이 안 될까.


그래서 이 기회를 맞아 나는 보이즈처럼 진지하게 연구를 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것은 궁극의 비눗방울을 만들기 위한 여정의 기록이다.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간다


우선 비눗방울이 생성되는 원리부터 살펴보자. 순수한 물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방울이 세제를 섞으면 만 들어지는 까닭은 세제의 계면활성제가 물의 분자 사이로 들어가 그들이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밀어내기 때문이 다. 그 결과 비눗물이 섞인 액체는 작은 물방울로 뭉치지 못하고 바람을 따라 늘어나게 된다. 과학 용어로는 표 면장력이 낮아진 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비눗방울은 용액 속 물이 증발해 그 막이 약해지기 전까지 버틸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그 비눗방울이 가장 오래 유지되는 물과 세제의 비율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이 될 것이다. 사전 조사를 위해 인터넷에서 수많은 레시피를 뒤져보았지만, 그 결과는 뒤죽박죽이었다. 1:1에서 16:1, 혹은 물보다 세제가 많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많은 의견이 모아진 것은 대략 2:1에서 8:1 사이였으므로, 나는 물과 세제를 1:1에서 8:1까지 섞은 동일한 양의 비누 용액을 만들어 한 번에 비눗방울이 만들어지는 개수와 방울의 최대 크기, 그리고 단번에 터지지 않고 살아남은 개수의 비율과 버틴 시간의 평균값을 구해 보기로 했다. 



* 리서치 과정에서 찾은 비눗방울 아티스트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일한 비누 용액이라 하더라도 날씨와 습도, 바람의 정도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하여 실험은 25도의 바람이 닿지 않는 실내에서 동일한 빨대를 이용해 진행하였다.



실험 결과를 보면 한 번에 많은 비눗방울이 만들어지는 비율은 물과 세제를 4:1로 섞은 용액이나 터지지 않고 오래 버틴 시간이 가장 긴 것은 8:1 용액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터지지 않고 살아남은 비율이나 비눗방울의 최대 크기를 고려하면 4:1 용액을 제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진행한 실험은 용액의 온도가 비눗방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실험 전에 찾아본 한 자료에서는 온도가 높을수록 물의 표면장력이 낮아져 큰 비눗방울을 만들 수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자료에서는 온도가 높을수록 증발이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은 동일하게 유지한 채로 용액의 온도만을 달리하여 어느 쪽이 맞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는데, 비율 테스트를 할 때 썼던 용액을 활용하려 찬물(4°C)을 한 컵, 혹은 뜨거운 물(75°C)을 한 컵, 두 컵씩 섞는 방식으로 온도를 조절한 탓에 비누 용액 간의 온도차가 일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실수를 깨달은 시점은 이미 결괏값이 나온 이후였고,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실험을 더 진행하지 않고, 온도차에 서 추론되는 값을 구해 보았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 그래프는 꽤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준다. 온도가 높을수록 큰 비눗방울이 생기는 것도 맞고, 대신 오래 버티 지 못하는 것도 맞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의 목적에 맞는 적당한 온도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생성 개수만을 본다면 25도를 넘긴 시점에서부터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고, 최대 크기 역시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나라면 비눗방울이 쉽게 터지지 않고, 좀 더 오래, 많이 공기 중을 떠도는 25도의 용액을 선택하겠다. 여러분은 어떤가?


실험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몇 년 전 지역 축제에서 비눗방울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버블 아티스트는 눈에 확 띄는 알록달록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연기로 가득 찬 비눗방울을 몇 개씩 만들어 공중에 띄우다가 내다가 어린아이 세 명을 무대 위로 불러 올렸다. 그는 아이들을 무대 중앙에 세우고는 훌라후프처럼 생긴 틀을 이용해 그 아이들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비눗방울 벽을 만들어 내었다. 그 벽은 쉬이 터지지 않고 아티스트의 손짓에 따라 젤리로 만든 벽처럼 출렁이다 한순간에 휙 사라졌는데, 비눗방울이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탓에 그 잔상이 눈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설령 공연을 할 계획은 없더라도 이왕 비눗방울 놀이를 할 거라면 커다랗고 튼튼한 비눗방울을 만들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과 세제에 추가되는 제3의 재료에 대한 연구가 필 요했다.


Photo by Alexander Dummer on Unsplash (그렇다. 적어도 이 정도 크기는 되어야 한다) 


그 결심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물과 세제의 비율만 기록하고 닫아버렸던 수많은 인터넷 레시피를 다시 찾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어리석음에 눈물이 흐른다......)


하루가 꼬박 걸렸지만 그 결과 비눗방울 계의 선도자들이 선호하는 재료를 꿀과 글리세린, 물엿과 설 탕, 그리고 전분 가루와 베이킹파우더, 총 여섯 가지로 추려낼 수 있었다.


그 각각의 효능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비슷해서 비누막의 두께를 더 두껍게 해 수분이 쉽게 증발하는 것을 막 고, 그 결과 비눗방울이 오래갈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두께가 두꺼워지면서 비눗방울의 강도 역시 증가해 더 큰 비눗방울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였다.


원리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었지만, 배합률에서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추천하는 비율이 물과 세제 때와 마찬가 지로 각양각색인데, 모두가 자신의 레시피는 검증이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어느 것 하나를 고르기 힘들었다. 결국 유사한 것을 제외하는 방식으로 갔는데, 그렇게 하고도 총 16가지의 조합이 나왔다.


동일한 양의 비눗물을 만든다고 가정할 때 각 재료의 배합률



동일한 양의 물을 사용할 때 들어가는 첨가물의 비율



16가지의 레시피를 모두 재현하는 것은 무리인 데다 비효율적이라는 판단 아래, 결국 리서치 초반으로 돌아가 추천받은 6가지 재료 각각에 대한 실험을 먼저 해보기로 했다. 이때 베이스는 물:세제 실험 시 가장 효과가 좋았던 4:1 용액으로 통일하고, 각각의 재료는 세제와 동일한 양을 추가하여 진행하였다.


비눗물 조제 현장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용액 조제 후 1시간 이내 관찰 결과


그래프를 보면 재료별로 비눗방울의 생성 개수나 최대 크기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생성 시 바로 터지 지 않고 버틴 비눗방울의 비율은 베이킹파우더를 섞은 용액이, 터지지 않고 버틴 시간이 긴 비눗방울의 비율은 글리세린을 섞은 용액이 독보적으로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세제만 섞었을 때는 10 초를 넘기지 못했던 비눗방울이 글리세린을 섞자 평균 105초 간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이즈음부터 스톱워치를 손에 쥐고 비눗방울이 터지길 기다리는 게 점점 더 지루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바이다.)


이것만으로도 꽤 만족스러운 성과였으나 선도자들의 조언 중에는 시간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 많았으므로, 첫 번째 실험 이후 각각의 용액을 밀봉하고, 6시간마다 똑같은 실험을 진행해 그 결과를 보기로 했다.

용액 제조 후 숙성 시간 별 비눗방울 유지 시간 변화 그래프



숙성 시간 별 비눗방울 생성 시 터지지 않고 유지되는 비율 (%)



그 결과 설탕과 베이킹파우더 용액을 제외하면 (실험 중 쏟았다......) 모든 용액에서 비눗방울의 유지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비눗방울 생성 시 터지지 않는 비율은 옥수수 전분과 물엿을 제외하면 오히려 6시간 이후 크게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여기에서 착안해 조합했을 때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시켜 단독으로 쓰일 때보다 높은 효과를 내는 배합이 있을지 추가 실험을 진행해보기로 했다.


제조 가능한 조합은 총 15가지이나 실험 결괏값이 좋지 않은 설탕과 유지 비용이 걱정되는 꿀을 제외하고, 남 는 재료 중에서도 그래프의 변화가 유사한 조합을 제외하자 비눗방울 유지 시간이 긴 글리세린과 터지지 않는 비율이 증가하는 물엿. 둘 다 가루라는 유사점이 있는 전분과 베이킹파우더. 그리고 실험 초반 각각 시간과 비 율에서 높은 성적을 기록한 글리세린과 베이킹파우더가 남았다.


실험은 단독 재료 때와 같이 4:1 비누액을 베이스로, 조합은 처음에 넣었던 양의 반. 그러니까 물과 세제, 재료 1, 재료 2의 비율이 8:2:1:1이 되도록 설정해 진행했다.


물엿과 글리세린 조합의 숙성 별 비눗방울 유지 시간 비교 그래프(sec)


대단하지 않은가? 물엿과 글리세린을 함께 섞은 비누 용액은 무려 5분이 넘도록 터지지 않는 비눗방울을 만들 어 내었다. 실험 시간이 다른 용액들에 비해 서너 배는 오래 걸렸지만 투자할 만한 조합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양손에 스톱워치를 하나씩 들고 눈이 빠져라 비눗방울을 지켜봐 준 고래 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 그래프에 어째서 다른 두 조합의 결과는 없는지 궁금할 것이다.


전분 + 베이킹파우더의 조합


우선 전분과 베이킹파우더는 섞는 과정에서 실수를 했는지 부글부글 거품이 되어 실험을 진행할 수 없었고, 글 리세린과 베이킹파우더 용액의 비눗방울은 천천히 바닥에 들러붙듯이 그 크기가 줄어들어 다른 용액과 동일한 조건으로 터지는 시간을 측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물엿/글리세린 용액과 베이킹파우더/글리세린 용액의 효능 측정에는 전통적인 비눗방울용 도구인 빨대 외에 다른 도구도 써보기로 했다. (그때까지도 전분과 베이킹파우더는 맹렬히 부글거렸다.)

어차피 비눗방울을 만드는 데에는 입김을 불어넣는 것 외에도 버블 아티스트들처럼 길고 둥글게 묶은 끈을 이 용한다거나 기술의 발전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으므로 그러한 방식을 통해 용액의 효과를 확인하고자 한 것이 다.


실험 내내 사용된 빨대
나무젓가락에 지름 10mm의 끈을 삼각형 형태로 묶어 제작한 도구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바람이 나오는 비눗방울 발생 기계


처음엔 비눗방울의 지름을 재어 기록하고자 하였으나 비눗방울이 좁은 실내에선 장애물에 부딪혀 터지고, 실외에선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으므로 마지막 실험의 결과는 다음 세 장의 사진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바닥에 보이는 흰 종이의 짧은 면 길이는 778mm라는 말로 이 뿌듯함을 전한다.



비눗방울이 분당 150개가 넘는 속도로 공기 중에 퍼지는 순간이다.



보이는가, 저 길게 이어지는 비눗방울이!


이리하여 커다랗고 튼튼한 비눗방울을 만들고자 했던 처음의 바람은 충족되었다. 그러나 이 배합이 ‘궁극의 비눗방울’ 제조법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분명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의 실험은 인터넷을 떠도는 수많은 비눗방울 레시피에 두 개의 레시피를 추가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떠랴. 누군가는 그 혼돈 속에서 도움이 되는 요소를 찾고, 더 세심히 조합하고 실험하면서 새로운 제조법을 만들어 낼 텐데.


지난번에도 말했듯 놀이는 그렇게 이어지는 법이다. 


그러니 내 몫의 비눗방울 연구는 여기에서 마친다. 


“Play long and pros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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