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디자인> 매거진 기사를 위한 1문 1답 인터뷰
지난 여름, 매거진 <공예+디자인>의 메이커 스페이스 관련 특집 기사 작성을 위한 서면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릴리쿰 스테이지 공간의 성격과 맥락에 대한 좋은 소개글이 될 것 같아, 발행처의 동의를 구하여 1문 1답 인터뷰 내용을 온라인에 게재합니다. 좋은 질문들을 던져주신 문은영 에디터님, 그리고 공예+디자인 매거진에 감사드립니다.
몇 년 전부터 DIY를 뛰어넘어 스스로 물건을 제작하고 공유하는 일종의 문화 운동인 ‘메이커 무브먼트’가 전 세계적으로 대두되면서 국내에서도 메이커들이 오픈 커뮤니티 랩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커 스페이스를 통해 자신만의 작업을 구축하고, 역량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곧 정부 지원도 활발해졌고, 지자체에서도 지역의 메이커 스페이스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예+디자인] 39호에 메이커 스페이스 역할을 하고 있는 공간들을 소개하고, 발전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Q1. 릴리쿰에서 현재 하고 있는 활동, 프로그램 및 공간 내 설비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 드립니다.
A. 릴리쿰은 실험 - 공작 - 출동 - 발사의 형식으로 다양한 문화, 예술,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동시에 ‘릴리쿰 스테이지’라는 메이커 스페이스를 서울 연남동에서 운영하고 있어요. 공간은 디지털 제작에 유용한 장비들,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기반으로 한 자가출판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자수와 니팅, 직조와 같은 패브릭 기반의 작업도 할 수 있도록 세팅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런 시설들을 바탕으로 월간 정규 프로그램과 비정규 프로그램, 커뮤니티 랩, 멤버십 활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Q2. ‘제작, 놀이, 실험의 아지트’라는 릴리쿰의 소개가 메이커스페이스의 문턱을 낮춘 느낌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는 ‘메이커’라는 말조차도 생소할 수 있는데요, 릴리쿰이 생각하는 ‘메이커’, ‘메이커 스페이스’의 정의가 궁금합니다.
A. ‘메이커’는 정해진 기술이나 자격을 갖추어야 어울리는 타이틀이 아니라, 어떤 ‘태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만드는 행위에 대해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메이커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지향하는 ‘메이커 스페이스’는 이런 사람들이 다양한 경험과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놀이터이자 실험실입니다.
Q3. 제작, 공정, 메이킹 등 만들기를 대신하는 말이 참 많습니다. 이를 다 묶는 말인 ‘만들기’는 소소하게 취미 삼아 만들기를 하는 사람들까지 다 묶어 영역이 더 넓어집니다. 릴리쿰은 시제품 출현이나 정밀한 제작 과정을 추구하기보다는 ‘만들기’를 추구하는 그룹 같습니다. 생활과 연계된 만들기, 릴리쿰이 추구하는 만들기는 삶에 어떤 변화를 준다고 생각하시나요?
A. 더 넓게 생각하면 만들기는 삶을 더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생활에 필요한 기술들은 ‘전문가’에게 위임하고 그 서비스를 사기 위해 임금 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삶이 아닌, 대안을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릴리쿰은 6년 전 즈음에 아이폰을 직접 자가수리하도록 돕는 워크숍을 열었고, 최근에는 스마트 체중계를 직접 뜯어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파헤쳐보는 리버스 엔지니어링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의존하고 있는 기술들에 대해 직접 탐구하면서 내 주변의 세계를 이해해 나가는 경험은 무엇보다 삶의 방식에 대한 생각에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어째서 내가 소유한 물건의 스티커를 제거하면 안되는지 질문하고, 직접 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실천은 기업들이 생산과 관리의 편의를 위해 정해놓은 시스템에 작은 균열을 내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쓸모있고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일만큼, 쓸모없지만 즐거운 만들기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들과 만날 때 이런 ‘만들기’가 일어납니다. 놀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노는 시간은 한 인격의 형성과 성장에 필요한, 훌륭한 거름이 되어준다고 생각합니다.
Q4.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집이나 자신만의 공간에서 소소하게 목공, 뜨개질 등 다양한 만들기를 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메이커들이 메이커스페이스에 모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만들기의 좋은 점 중 하나가 혼자서도 몰입할 수 있고 그 기쁨을 오롯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릴리쿰 스테이지와 같은 메이커 스페이스에서는 ‘연결’을 통해 더 즐거운 일들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요. 그리고 메이커 스페이스는 다른 어떤 공간보다 새로운 제작을 어렵지 않게 시도할 수 있고 다른 재료와 기술들을 접목해 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운영자도 사용자도 그런 강점을 잘 활용해 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Q5. 놀이터 사업이나 릴리쿰의 교육 프로그램, 지역 활동을 보면 남녀노소 모두 참여할 수 있어 놀랍습니다. 릴리쿰이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나요? 그리고 왜 그것을 전하려고 하나요?
A. 놀이 할 권리, 생산자가 될 권리, 자기다움을 지킬 수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펼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놀이-예술-기술-문화-교육의 방향으로 활동의 반경이 넓어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팝업 놀이터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일인데, 놀이터에서 함께 노는 시민들도 질 높은 공공 놀이터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어요. 교육 프로그램으로 지역이나 특정 기관에 ‘출동' 할 때는 무엇보다 ‘교육’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이 되기를 기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만날 때 우리가 선생님이 되기보다는 ‘동료’가 될 수 있는 커리큘럼을 지향합니다.
Q6. 메이커 스페이스가 제작을 위한 공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공간보다 중요한 것이 메이커 개개인이 모여 만드는 비가시적 커뮤니티입니다. 그 점에서 릴리쿰의 커뮤니티는 단단하게 구성된 느낌을 주는데요, 메이커들의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있거나 커뮤니티를 통해 발전된 아이디어가 있나요? 커뮤니티가 구성되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있나요?
A. 이전에 진행되었던 커뮤니티 중에는 전자공학에 대해 공부하는 소모임이었던 ‘전자공학도들’이 있었어요. 전기와 전자회로에 대한 기초부터 함께 공부해보자는 취지로 모인 모임이었고, 짜여진 커리큘럼에 의존하기보다는 각자가 갖고 있는 통찰을 나누거나 아이디어를 주고 받는 대화를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좀 더 쉽게 전자 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흐름으로 ‘전자요리’라는 브랜드를 런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자요리’와 같은 접근 방식에 관심이 있는 여성 작업자들이 모여 진행한 ‘전자요리연구회’도 있습니다. 전자요리연구회의 실험은 2016년에 토탈미술관에서 ‘전자요리 오픈 키친’ 이란 제목의 워크숍 퍼포먼스를 통해 발표했어요. 최근에는 스테가노그래픽 니팅 클럽(암호뜨개단)이라는 연구/제작 커뮤니티를 막 시작했고요. 커뮤니티를 통한 시너지 효과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접근이 가능해지고 실행력이 커진다는 점인 것 같아요.
전자요리: 전자 회로를 ‘요리’라는 가장 근본적인 제작 행위와 연결하여 기술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연구하고 콘텐츠로 개발합니다.
전자요리연구회 : https://reliquum.co.kr/archives/1167
Steganographic Knitting Club 암호뜨개단 : https://brunch.co.kr/@reliquum/75
Q7. 릴리쿰은 단순히 테크롤로지 기술만 지원하는 메이커스페이스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큰 이유가 예술과 기술이 만난 결과물이나 프로그램 때문인 것 같습니다. 릴리쿰에게 예술과 기술은 어떤 의미인가요?
A. 예술은 인간의 창조적 활동이자 사유라는 점에서 릴리쿰이 추구하는 모든 활동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쓰고보니 엄청 거창하네요.) 릴리쿰이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예술가’의 역할이나 활동으로 정확히 범주화되진 않지만, 개개인의 창의력과 일하는 능력을 모아서 함께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그룹입니다. 지속가능한 수익 모델을 탐색하기 위해 교육이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여러가지 협력 프로젝트 등을 병행하다 보니, 이제는 사업 조직으로서의 트랙을 함께 만들고 있지요. 기술은 어쩌면 끝없이 제공되는 재료, 탐구의 대상입니다. 기술로 인해 끝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떠밀려 가기 보다 제대로 헤엄을 쳐 나아가고 싶다면 그게 무언지 알아봐야 하니까요. 릴리쿰 스테이지가 비싼 임대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한국의 하위문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홍대 인근(연남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유는 기존의 시스템에 나를 끼워 맞추기 힘들고 대안적인 길을 모색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술과 기술 그리고 사람이 즐겁게 조우하는 공간, 삶의 전환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기술의 시작을 지원할 수 있는 공간이고 싶습니다.
Q8. 메이커스페이스라는 말이 생소할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독보적인 색깔로 릴리쿰을 유지하고 계신데요, 릴리쿰을 시작할 수 있었던 힘과 유지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요?
A. 릴리쿰은 ‘놀이’로서의 만들기를 추구하면서 활동을 시작했고, 땡땡이공작 활동의 선언 중 하나였던 ‘우리는 쓸데없는 것의 힘을 안다'는 여전히 활동의 중요한 모토입니다. 활동의 시작과 새로운 도전의 여정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처음부터 ‘일’이기 보다는 ‘놀이’가 될 수 있는 요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릴리쿰이 여러가지 실험과 활동들을 통해 발사하는 생각과 메시지에 공감하고 응원해주는 분들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프로젝트나 시도를 계속 해오면서 나름의 성장 그리고 ‘버티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Q9. 현재 정부와 지자체 또한 지역사회 안에서 메이커 무브먼트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릴리쿰도 작년부터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요, 정부 사업의 일환으로 어떤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나요? 앞으로 정부 사업으로 진행될 메이커스페이스가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A. 릴리쿰은 메이커 문화의 핵심 콘텐츠를 (비교적) 오래 전부터 다루어 왔기 때문에 메이커 스페이스 구축이라는 정부 지원 사업을 통해 생긴 변화는 다양한 장비들을 갖출 수 있었던 점, 그리고 공간의 상시 오픈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점 외엔 없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다른 메이커 스페이스 중에는 이 사업을 통해 메이커 문화에 진입한 경우도 많아 어려움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어려운 점은 메이커 스페이스 운영자에게는 테크니션, 커뮤니티 매니저, 교육자의 역할이 동시에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인재가 많아지려면 역량 강화와 지속적인 콘텐츠 개발이 병행될 수 있는 지원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메이커 스페이스는 각 공간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 맞게 운영력과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정부는 각 공간의 특성에 맞는 성과 측정 지표를 대입할 수 있도록 유연하고 적합한 성과 지표 개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예+디자인> 39호 전체 온라인으로 보기
: http://www.kcdf.or.kr/web/cop/bbs/selectBoardList.do?bbsId=BBSMSTR_000000000006
글 | <공예+디자인> 문은영, 릴리쿰 선윤아
사진 | 박순애 스튜디오 수달
자료 출처 | <공예+디자인>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