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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liquum Feb 09. 2021

이름 없는 테이블의 책수다,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이름없는 테이블의 즐거운 수다

릴리쿰에는 ’이름 없는 테이블’이란 인문 토론 모임이 있습니다. 


시작은 2020년 7월 초, 연일 화나고, 답답한 소식들만 갱신되던 때였죠. 생각은 많은데 이를 토로할 곳이 없어 스트레스를 받던 중, 혹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있다면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자는 공지를 올린 것이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름도 미처 정하질 못해서 ‘아직 이름은 정하지 못했지만 모입시다’하고 공지를 냈었어요. 


그 어설픈 초대에 응한 사람들은 모두 다섯으로, 안주 삼기에 딱 좋은 분노와 좌절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정부와 정치인, 성범죄자들을 씹는 시간을 가졌더랬습니다. 


안전한 집단 내에서 생각과 마음을 나누고, 지지하고 지지받을 수 있었던 경험은 한 번으로 끝내기엔 아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약속을 정해 미국 국가대표 팀닥터 래리 내서의 성범죄를 고발한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를 보았고, 그다음 번엔 ‘피의 연대기’를 보며 생리컵을 공동구매하기도 했습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읽고 맹렬한 토론을 한 날부터는 더 맹렬한 보드게임 나잇도 시작되었지요. 하하. 바이오해킹, 제인에어 다시 보기. 조금씩 사람 수가 늘어난 만큼 이야기를 나누고픈 주제도 늘어가 '이름없는 테이블'은 쉼 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던 중, 조금 다른 시도를 해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인문360도, 우리동네 인문학 수다 공모전>에 지원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것이죠. 남의 돈으로 원하는 책을 구매하고, 모임을 열며, 저자를 초청한 북토크를 할 수 있다니,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솔깃할 제안이지 않습니까?


마감을 이틀 남겨두고 좋아, 하자! 결심한 우리는 부랴부랴 지원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는 140권의 추천 도서 목록 중에서 골라야 했기 때문에 급하게 의견도 모았습니다. 그렇게 고른 책은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이었습니다.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은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 이 때, 코로나19의 현실을 견디는 것이 급급해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문화, 의료, 젠더, 정치, 노동, 종교 등 다양한 영역의 사회학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우리의 삶에 대해 풀어놓는 이야기로, “비대면과 재택근무, 동선 공개, 신천지, 돌봄노동과 여성, 가족, 노동, 민주주의와 모더니티의 문제까지 폭넓은 논의”를 펼치고 있는 책입니다. 












책수다 진행 계획, 저자 섭외 계획, 북토크 계획안과 예산까지. 채워야 하는 내용은 많은데, 서류 작업이 익숙지 않아 버벅대긴 하였으나 마감 10분 전 겨우 작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메일 주소를 갖다 붙이고, 제목과 내용을 작성하고, 지원서를 첨부하느라 자정을 넘기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기억이 나네요.


성격이 급하니 후회도 빨라,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어차피 안 될 일에 괜히 시간만 낭비한 게 아닐까 의문을 품기는 했습니다만, 며칠 지나지 않아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짠짠짠


-


그럼 다음 단계는 이 멋진 기회를 공유할 동료를 더 찾는 일이었죠.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공고를 냈습니다. 



처음엔 (포스터에 그려진 대로) 3분만 모집할 계획이었으나, 신청서를 보면서 고민했습니다. 무슨 수로, 그리고 무슨 자격으로 함께 하고 싶어 모인 사람 중 몇 명은 선택하고 몇 명은 거절한단 말인가. 그래서 이 모임을 처음 시작할 때 그랬던 것처럼 모두 함께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두 15명의 사람이 이름없는 테이블에 모여 앉았습니다. 



자, 이제 책수다를 시작하지.


첫번째 책수다

2021. 1. 16. 1:03pm

보름, 물고기, 아름, 해진, ROH, 수정, 혜영, 청하, 하영, 수하, 쥬, 상욱, 뭉, 지선, 상은


(자기소개와 인사에 오고간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물고기 신천지 챕터를 읽으면서 개신교가 떠올랐다. 광화문 이후 개신교발 단체 확진 소식이 이어지고 있는데, 개신교도 이런 시각으로 다루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다. 개신교도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해봐야 하지 않을까. 오늘 정세균 총리가 카페와 교회의 제한을 완화한다는 발표를 했는데, 카페의 제한 완화는 개신교 집합 완화를 위한 들러리란 느낌이 들었다. 합리적인 판단이라기보단 압력에 굴했다는 인상을 주는 결정.


상욱 신천지 파트는 신천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신천지를 타국으로 선정하고, 신천지를 나온 걸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설정한 게 웃겼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존재는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한국 속의 타국으로 설정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고. 10장 모더니티에서도 언급되지만, 신천지를 비롯해 각종 유사 종교들이 80년대에 등장을 하기 시작했는데, 서울의 봄이 짓밟히고 정치적인 실패와 배신이 축적되며 길을 잃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버렸다는 진단이 나온다. 그런 점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것 같다.


청하 요즘 내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억압된 것들은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것이다. 신천지뿐만 아니라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이 결국 그간 억압되어 온 것들이 아닌가 싶었다.  돌봄 노동도 그렇고. 코로나 이후에도 억압된 것들은 괴물이 되어 돌아올 것 같다.


수정 비슷한 관점에서, 여성에게 국한 되는 돌봄 노동이 어떻게 돌아올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물은 부정적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여성들에게는 재택근무가 난해한 문제다. 여성들은 집에서 업무만 볼 수 없으니까. 


물고기 외국에서 자가격리가 한창이던 때 나온 통계를 본 적이 있는데, 남성학자들의 논문 발표는 많이 늘어난 반면, 여성학자들은 그 수가 이전보다 줄었더라. 똑같이 집에 있더라도 일에 집중할 수 있는지 여부에 성차가 매우 크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는 더 심할 것으로 예상되고, 그 불균형이 크게 와 닿았다.



돌봄에 초점을 맞추자면 사회와 지역 차원에서 비상시 돌봄계획을 입안하고 훈련해야 한다. 가족과 여성의 힘을 빌리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이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증가하는 돌봄 부담에 비례해 다른 역할 부담을 축소하며 이들의 기여를 인정, 보상하는 계획과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9. 민주주의자로서 비상사태를 상대하기, 장진범)



물고기 꼬투리 잡는 거 같긴 한데, 이 부분을 읽으며 이게 무슨 말이지? 다른 역할 부담이 뭘 말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설마 사회적인 거 줄이고 보상 잘해줄 테니 집안일 좀 하라는 건 아닐 거라 믿고 싶은데,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궁금하다.


ROH 다른 모임에서 '젠더와 민족'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서 공과 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동안의 역사에서 남성을 공적인 영역으로 두었다면 여자나 가족은 사적인 영역으로 두었다는 말이 나온다. 그 부분이 떠오르며 '돌봄 부담에 비례해서 다른 역할을 축소해 준다'라니, 돌봄이라는 사적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다른 공적인 역할에 대한 부담을 축소해 주겠다. 즉 돌봄을 여성에게 정해진 역할로 보고 있는 것처럼 읽혔고, '아, 이 문장 되게 골 때리네'하고 생각했다. 


하영 지방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에는 원래 돌봄 무급휴직이라는 것이 있다. 회사에서 노동자로서 역할이 있더라도 돌봄이 필요한 때가 오면 노동의 의무를 덜어주는 게 이미 체계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 때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이 돌봄 휴가를 몰아서 썼고, 그 결과 월급이 반 토막이 났다. 돌봄 중요하지? 노동의 의무를 덜어줄게. 집에 가. 그런데 사실 짐을 좀 덜어준다고 해서 완벽히 보상되는 게 아니다. 일을 안 하는 대신 돈이 깎이니 여성 입장에서는 수익은 줄고, 돌봄은 계속해야 하고, 회사에서는 고가도 깎인다. 삼중고가 찾아오는 것이다. 사회에서 돌봄에 대한 보상체계를 마련할 때 돌봄으로 인한 매몰 비용을 등가해서 쳐주지 않는 데다 엄청난 평가 절하가 있다. 가사노동도 이제 겨우 재평가하는 중인데 이걸 보상해 줄 수 있다 상상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나이브하다고 생각했다. 


ROH 
코로나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공과 사를 구분 짓고 사적인 영역으로 여성들을 몰아넣는 그런 형태로 지금 진행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영 
논문 편수의 얘기로 돌아가면, 남성학자들은 학교에 가면 수행해야 하는 행정 업무가 줄어들어 이득을 본 반면, 여성학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여성 교수들에게는 오히려 학교에 출근하는 것이 육아, 가사노동에서 퇴근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자신의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 물리적으로 단절되는 연구실이 유일했는데 그것이 없어진 상황. 여성 연구자들은 집에 머물게 되면 곧바로 시간 빈곤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물고기 여성은 출산 휴가만, 육아 휴가는 남성만 쓸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아이를 낳은 경우 남성이 필수적으로 육아 휴직을 해야만 하면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하영 나는 그렇게 되면 여성들이 휴직도 못 쓰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육아를 하게 될 것 같다. 남자들은 집에서 놀면서 퇴근하는 여자를 기다리기만 할 수도. 요즘 남성 육아 휴직의 폐해로 조사된 사례가, 그 기간에 (육아를 하는 게 아니라) 자격증 준비를 하거나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것이다. 


보름 나도 주변에 남성 육아 휴직하고 이직 준비하시는 분들을 많이 봤다. ㅎㅎㅎㅎㅎ


수정 이번에 내복 바람으로 길에서 발견되었던 아이의 사건 같은 경우에도 오히려 양육비를 주지 않은 아빠를 취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물고기 엄마가 입건되었다고 들었다. 웃기는 일이다. 다른 사건에서 아이에게 술을 훔치게 한 아빠는 오히려 지원을 받지 않았나? 

 

해진 엄마는 양육을 위해 전일제 근무를 반일제로 바꾸려고 상담하던 중이었다고 들어서 더 안타까웠다. 


물고기 양천 아동학대 사망 사건과 맞물려서 더 이슈가 된 측면이 있다. 법에 원칙이 없다는 느낌이다. '아동학대치사'로 얘기하다 언론에서 주목을 끄니 '살인죄' 적용이 가능한지 검토를 해봤다 들었다. 이 사건도 평소라면 조사로 끝났을 텐데 주목을 받으니 '엄마를 입건합시다'가 된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 관심을 받지 못한 다른 여러 사건은 대체 어떻게 처리가 되는 걸까. 원칙은 어디에 있는가. 법이 SNS도 아니고 '좋아요' 수에 좌우되는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하영 지금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이 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반은 '국뽕', 반은 사생활 침해, 신상털기에 대한 우려다. 그런 양가적인 입장과 감정이 61쪽 부분 K-방역에 대한 이야기에 그대로 나와 있어서 재밌었다. 다른 분들은 K-방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하다.


보름 K-방역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이 있으나 한국인의 태생적, 교육받은 특성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나라에는 똑같은 시스템을 적용해도 제대로 못 할 것 같다. 그야말로 '찐' K-방역이랄까.

비판받을 요소는 정말 많다. 정책을 깊이 분석하고, 이후의 영향을 고려할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다 보니 순간의 확진자 숫자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외면해 온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눈덩이처럼 불어나 돌아오는 일을 종종 겪지 않았나. 지금 코로나 사태 중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비져나오는데, 힘들 때일수록 좋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프로파간다적인 것들 - 효과적이잖아요? - 에 눌려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K-방역이라 하면 내 안에서는 '국뽕'과 '헬조선'이 뒤섞인 느낌.

그래도 주변을 보면 정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는 한 것 같다. 안전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어떤 혜택을 받거나 피해를 받거나. 국가적 결정에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막 생기니까. 예전에는 정책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면 요즘에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아지는 듯하다.


혜영 나는 연극을 하는 사람인데, 굉장히 다양한 사이드잡이 있다. 간병, 장애인 활동 보조도 그중 하나다. 재활병원에서 간병을 하면, 중증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략 하루에 10~12만 원을 받는데, 맡았던 환자가 퇴원해서 다른 병원으로 간병을 가면 안 받아 준다. 그 병원에서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보름 있다가 오라는 식이다. 강제적으로 놀아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ROH 오늘 오전 뉴스가 생각나는데, 경기 후 귀국한 스포츠 선수의 경우 외국에선 특별대우를 해서 자가격리를 면제해 주기도 하는데, 우리나라는 무조건 해야 해서 경기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하더라. 재밌다고 생각했다. 모든 현상은 한 가지로 볼 수 없다. 선택으로 인해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 경우엔 K가 붙는 것 중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판단하는가의 문제가 된 것 같다. 스포츠 선수가 나가서 기량을 펼치는 것에 K를 붙이는 것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K-방역에 더 의미를 둘 것인가. 


혜영 나는 사실 K를 붙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한국 방역이라고 하면 되지 왜 다 K, K 타령인가. 


하영 브랜딩.


혜영 맞다. 브랜딩. 보여주기식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같이 섞여서 가는 느낌이다. 나도 어제 뉴스를 봤는데, 몸을 부대끼면서 운동하는 유도선수들이 코로나 때문에 악수는 못 한다고 하더라. 이게 뭐지 싶었다. 정책들이 디테일하지 못하다. 간병인들이 보름을 쉬어야 한다면 그동안의 보수를 보장한다든지, 유도선수들은 접촉을 막는 의미가 없으니 악수를 허용한다든지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건 고려되지 않는다. 내가 보는 K-방역은 대충 뭉툭하게 정한 규칙을 들이밀고, 이거 안 지키면 너네는 나쁨. 하고 우기는, 그렇게 이루어 낸 것 같은 느낌이다. 


하영 나도 이번에 알게 된 것인데 운동선수는 쉬게 되면 근육이 쉽게 풀어지기 때문에 자가격리 기간이 엄청난 손실이라고 하더라. 특히 선수 생활이 짧은 분야라면 그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생애 전체 기대 소득에도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2주와 운동선수들의 2주는 굉장히 다른 것이다.

이번에 설문조사를 하며 알게 된 것인데 뇌병변 장애인 같은 경우에는 재활 치료가 일상적으로 필요하다. 건강검진을 조금 미루는 것 같은 문제가 아니라 하루라도 처치를 받지 않으면 근육이 하루 만에 굳을 수도 있고, 만약 호흡기 쪽이 문제라면 정말 위험한 상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서비스가 끊기거나 자가격리를 하는 것이 생존과 연결되는 문제인데 우리나라는 장애인 콜택시도 대면 서비스라고 못 타게 하고, 장애인 시설, 자립 생활 시설부터 폐쇄시켰다.

규칙을 일괄적으로, 차별 없이 적용하는 거 자체가 차별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K-방역 혹은 표준화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이번에 매우 크게 느꼈다. 민주주의 파트에서도 나오는 얘기다. 너무 많은 것들이 공공에 대한 것 이타적인 것으로 둔갑해 버리는 상황. 


물고기 코로나가 우리 사회 아래에 산재해 있던 문제들을 떠오르게 했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할 것 같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는가 하면 모르겠다. 코로나라는 폭탄이 던져졌고, 수면 아래에 있던 것들이 떠올라 진흙탕이 되었는데, 정부는 그것들이 다시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되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초반에 급해서 모든 대면 서비스를 금지한다고 했던 것은 이해한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라도 발생되는, 혹은 예상되는 문제를 체계적으로 살피고 정책으로 보완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노래방은 위험하니 닫으세요-에서 끝이다. 노래방을 운영하는 사람의 생계와 임대료에 대해선 눈을 가린다. 임대료가 부담인가요? 착한 임대인 운동 어때요? 끝. 운동으로 할 것이 있고, 정책으로 풀어야 할 것이 있는데 정책으로 나서는 것에 매우 소극적인 느낌.


청하 결국 소위 말하는 K-방역은 책에서도 언급되듯이 돌봄노동이나 값싼 가격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라는 그림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재난 안에서 또다른 희생자를 만드는 방식인 셈이다.


물고기 코로나 시대를 맞아 국민들이 더욱 관심을 갖게 된 정책들이 있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거나 차별금지법 같은 것들. 그런데도 외면한다. 180석을 갖고도 의지가 없다.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는 게 오히려 싫은가 싶을 정도. 답답하다. 


상욱 K-방역이라는 게 진영 논리로 뭉개져 버린 것 같다. K-방역을 체계적으로 검증하고, 반영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을 반대하면 K-방역도 무조건 부정하고, 지지자들은 미국, 유럽보다는 잘했다고 옹호하는 식으로 흘러간다. 

뉴스와 정부도 일 년 내내 검찰개혁, 장관의 아들 군병역 문제 같은 거나 얘기하고 있다. 총리는 전직 대통령 사면이나 운운하고. 또래 청년 절대 대다수가 검찰개혁이나 정부의 정책에 신경 쓸 여력 자체가 없는데, 그들은 그러고 있으니 그들이 우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소외되었다는 느낌. 일상과 정치권에서 오가는 논의의 괴리를 느낀다. 


물고기 K-방역은 둑에 구멍이 생겨서 일단 급한 대로 팔을 넣어 막았는데 그 상태로 발전을 못 하는 느낌이다. 구멍을 막고, 둑을 보강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인데, 돈은 안 풀고, 사람 갈아 넣으면서 '팔로 막히네~'하고 있다.


보름 정책은 기존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질이 더 강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전혀 새로운 상황을 겪으면서, 처음에야 '국뽕'이든 위기 극복을 위해서든 참고 견뎠지만, 이제는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책을 보면서도 많이 느낀 것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에서 사회를 재조립, 재디자인, 재정의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디어에서는 뉴노멀을 기술이나 비즈니스적인 발전만 이야기하는데, 이 책은 '뉴노멀'을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이 다 무너진 뒤 재정의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점이 와닿았다. 

 


하영 75쪽부터 마스크 공공성 이야기가 나온다. 마스크를 받을 수 있냐 없냐에 따라서 진짜 정부가 챙길 '우리'와 챙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구분된다는 얘기. 다 '우리' 같다가도 전쟁이 터지면 갑자기 피아 식별이 명확해지는 것 같은 상황인 것이다. 지난해 초 마스크 물량이 부족했을 때 해외에 있는 가족에서 마스크를 부치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상황을 떠올려 보라. 사생활 침해임에도 불구하고 수화물 검사가 정당화되었다. 위생 물품일 뿐인 마스크 하나가 시민의 적법성을 가르는 도구처럼 사용된 것이다. 책이 이 부분을 다뤄줘서 좋았다. 


수하 백신 접종이 곧 시작될 것이다. 접종 순위도 발표되었다. 마스크만 가지고도 피아 식별이 되었는데, 백신에 있어서 그런 피아 식별, 구분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싱가포르나 아랍 국가 같은 경우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데, 백신 접종이나 자가 격리 문제에 있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나라도 그런 부분의 고민,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물고기 의료 챕터를 보면 '커먼즈'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전염병의 확산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개개인이 단지 독립된 단자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며, 언제나 인간 이상의 존재들로 구성된 세계를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에게 환경이며, ‘그 우리’는 단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8. 면역이라는 커먼즈와 좋은 의료를 위한 투쟁, 백영경)


물고기 방역을 전쟁으로 가정하고, 분명한 피아 식별에 따라 '우리'만 살피고 어떻게든 한정된 것을 지키려고 하다 보면 결국 '환경'으로 존재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해 함께 좌초하게 될 거라는 의미일 것 같다. 


수하 우리가 서로에게 환경이고, 거기서 우리는 인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사실 그 말에는 우리 안에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이러스 같은 것. 환경이라는 게, 우리에게 적대적인 것도 환경이고, 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환경이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그런 게 있을 수 있다. 그런 맥락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

마스크의 경우, 해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을 공공시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것인가, 대중교통을 못 타게 할 것인가를 두고 질긴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생존을 '절대선', '절대적인 목표'라는 것을 기저에 깔아두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가치는 무시해 버린다) 생존 이상의 사회적인 '낭만'이 더 있으면 좋겠는데, (다른 나라의 방역과 우리나라의 방역을 비교, 평가할 때) 그 '생존'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남의 생존을 훼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존보다 낭만, 즉 인권이나 존엄과 같은 가치가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실생활에서는) 돈이나 권력 따위로 남의 생존을 훼손시키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선진국이 경제 발전을 위해 환경을 훼손하는 것이 그런 사례다. 인용한 문구에서 말하듯 인간만이 환경을 구성하는 게 아닌데, 사람들은 지구생태계의 문제를 일으키는 소비를 하면서도 돈을 내고 정당하게 이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그게 정당화된다. 그런 구조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발생에 대해서도, 인간이 생태계를 침범했기 때문에, 인간과 야생동물 간의 밀접접촉이 많아진 것이 이유라는 말은 크게 근거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야생생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인간 세상이 1인 생활권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쉽게 퍼졌다고 하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동물과의 접촉이 문제는 아닌 것. 어차피 인간만의 세상, 멸균적인 세상을 만들지 않는 한, 질병, 병균과의 접촉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리 생활권 안에 들어온 것을 모두 잘라낼 것인가. (이를테면, 박쥐를 멸종시킬 것인가. 그보다는) 우리를 위협하는 것까지 우리의 환경으로 인정하면서 균형점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존 만을 절대적 가치로 인식하고, 한국의 방역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무너지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그래서 피아 식별을 엄청나게 하고, 감염된 것을 쳐내고 잘라내면서, 우리라는 순수한 집단, 순수하고 무균에 가까운 것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생존만이 중요하다면 돌봄도 로봇이 하는 게 낫다. 로봇은 병균이 적고, 사람은 내부가 다 병균 배양소니까.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돌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아질 때도 (단순히 살아있는 것이 중요한 상태가 아니라 상호 교류나 사람이 살아가면서 갖는 존엄성 그런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서로를 돌보면 좋겠다.

  

상욱 인류와 동물의 접촉으로 인한 바이러스는 굉장히 유구하다. 흑사병도 쥐와 벼룩이 인간 영역과 겹치면서 퍼진 것이고, 조류독감은 비위생적인 사육체계에서 생긴 전염병. 우리의 근대적 생활 방식과 전염병이 무관하지는 않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렸던 일상, 근대적 생활 방식에는 질문을 가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정 코로나가 지나가도 또 다른 바이러스가 올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자연과 공존하는 방법을 조금씩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모색이 더 활발히 이어졌으면 좋겠다.


상욱 코로나 원천지가 중국 우한이라고 공인되어 있고, 박쥐와 중국의 식습관이 함께 묶여 얘기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은 '우한 바이러스'라는 말을 고집하기도 하고. 이는 중국 혐오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중국을 욕할 수 있을까?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지 않나. 중국에 우리의 모든 생산품과 공장이 몰려있고, 우리는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소비하고 누리고 있다. 우리도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 같다. 


물고기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금은 박쥐와의 접촉에 문제를 돌리는데, 만약 사람과 사람의 접촉에서 발생한 바이러스로 팬데믹이 일어나면 그때의 세상은 어떻게 될까.


수하 바이러스는 엄청 많다. 빨리 백신을 맞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바이러스 변이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 야생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포인트로 잡을 게 아니다. 인간 사이에서 바이러스가 퍼진 것은 인간들이 밀접하게 접촉하는 문명 때문이니까. 멸균된 캡슐 안에서 접촉 없이 산다면 생존에는 유리하겠지만 그런 삶은... 사람이랑 직접 채팅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자신에게 위험한 것은 인공의 것으로 대체하는, 가상 오피스, 가상 환경 속에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매트릭스 같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미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접촉할 만큼의 낭만이 있으면 좋겠다. 



물고기 동선 공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작년 초 확진자가 많지 않았던 때에는 확진자의 동선이 지나치게 상세히 재난 문자를 통해 전달되었다. 수가 적었던 탓에 추측도 어렵지 않아 커뮤니티, 네이버 뉴스 댓글에서 누가 확진자다. 동선을 보니 몇 번과 몇 번이 불륜이다 같은 추측성 댓글들이 넘쳐났다. 

 

하영 그 탓에 연말에 소개팅이 원래 많은데 사람들이 소개팅을 안 하려는 현상도 일어났다. 모르는 사람과 소개팅을 했다가 확진이 되면 얼굴 한번 보고 안 볼 사이인데 누구와 만났는지 공개되고 자가격리까지 해야 한다는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의 문제인 것. 내가 아는 대학원생 커플은 연애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각자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있고 뚜벅이이기 때문에 연애할 곳이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은 개인 존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감염병의 논리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어디까지 침해할 수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연애를 하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친밀함, 안전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원에 해당하고, 감염병의 논리로 제재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우리는 이를 많이 제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ROH 자연화라는 게 그렇지 않나. 팬데믹 이후에 사회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현상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자연적인 것처럼, 불가피하게 정해진 것처럼 생각하게 되면서, 원래 있던 개념과 혼재되는 경우들이 생기는 것 같다. 전염병은 자연적으로 발생했으나 이후에 발생한 것은 문화적인 현상인데 이런 것까지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면이 있다. 


지선 현재 공개되고 있는 확진자의 동선 정보는 타지역 사람인 경우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수준의 정보지만, 만약 같은 동네의 이웃이라면 확진된 사람이 누군지 쉽게 맞출 수 있을 수준이다. 그것에 문제의식은 있으나 양가감정이 든다. 그 사람의 신상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어떤 사람이 확진되었는데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으면 불안하다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하영 책에도 동선 공개로 고통을 겪는 분의 사례가 나온다.

최근 나도 분열적인 상황을 경험했다. 주변 인권 운동이나 시민 사회 일을 하시는 분들이 이번 정권에 친화적인 편인데, 그래서인지 그분들이 이번 정권이 저지르는 인권침해에 대해서 같은 감수성으로 접근하지 않으시는 거다. 앰네스티나 유엔에서 계속 권고안을 주면서 한국의 인권 침해에 대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자들은 문재인 정권이 일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시더라. 결국 확진자에 대한 혐오가 너무 심해져서 오랫동안 식당을 하시던 분도 문을 닫거나 가계가 무너지는 상황이 닥쳤다. 공개되는 사람의 생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생각하지 않고 다 투명하게 공개하면 해결될 거라는 편리한 사고방식이 있었다.


물고기 확진자 수가 적었던 때엔 일종의 '정죄 스포츠'로 활용된 면도 있었다고 본다. 


지선 부작용은 확진자들이 치료 후 사회로 복귀할 때도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감염되었는지 아는 상황. 닷페이스에서 확진자가 치료된 후의 일상을 취재한 영상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서 동선 공개에 대한 부분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고기 아쉽지만 정해진 시간이 지났다. 마무리를 겸해 돌아가며 한 분씩 발언해주시면 좋겠다.


보름 오늘 되게 재미있었다. 독서 모임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인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똑같은 텍스트를 읽고도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상상하는 영역이 달라서인 것 같다. 오늘 그런 부분들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름 코로나 사태가 시작되고 나서 코로나뿐만 아니라 환경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 세상의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아직 전 단계지만 정책이나 세상이 돌아가는 부분이라든지, 혹은 소외되고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관점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이 넓어지기도 했고. 그동안은 개인적인 불편에만 주목했었는데, 책을 통해 다른 입장을 헤아려볼 수 있었다. 


해진 코로나 국면을 겪으면서 막연하게 답답하지만, 딱 집어내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온전히 비판하지도, 열광하지도 못하는 그런 막연함이 있었는데 책을 읽고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체화된 것 같다.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는 그다음 문제다. 차별이나 배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정책을 빨리 만들도록 목소리를 내든, 압력을 가하든 말이다. 


수정 이 주제를 다루면서 생각지 못한, 좀 더 다방면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많이 배웠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이주노동자라든지, 미등록 외국인에 관해서도 얘기해보고 싶다. 올해를 시작한 첫 뉴스가 비닐하우스에서 사망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기사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얘기한 것들과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ROH 마스크에 대해서,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 흩어져 있었던 생각들을 이야기하면서 정리할 수 있었다. 함께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얼마 전에 친구랑 둘 다 마스크를 한 채 이야기하다 마스크 뒤로 둘 다 웃고 있는 것 같다는 걸 느낀 적이 있다. 마스크에 가려 서로의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데 "둘 다 웃고 있는 걸, 둘 다 알고 있네" 했던 순간, 되게 기분이 좋더라. 신기하기도 하고. 다음 시간에도 각자 읽은 책들에서 각자 길어온 생각들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거 같다.


혜영 사실 나는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을 읽고 나서 자기의 삶과 비교해서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했다. 그럼 아무래도 다음 시간, 다다음 시간에 "아, 이래서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하는구나" 하는 배경들을 조금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독서 토론은 책에 없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나. 북토크에 참여할 저자를 위해 질문을 미리 모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청하 온라인으로 모인 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임 것도 처음이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 자체가 작년에 우리가 다루었던 책들과 크게 생뚱맞지 않다는 생각을 읽으면서 했다. 돌봄이라든지 그림자 노동이라든지, 사회적인 부분이나 시스템을 볼 수 있었던 것들도. 시기적으로, 개인적으로 나에게 와닿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라는 현실을 약간의 긍정성을 갖고 본다면 일상을 멈추게 한 것인 것 같다. 그동안은 돌봄이나 보이지 않는 노동이나 환경이나, 이런 것들이 전부 계속 뒷전으로 밀리지 않았나. 이거는 나중에 보면 돼. 나중에 다뤄지면 돼. 이런 식으로 다음의 것으로 밀렸던 것들이 코로나로 인해 지금 이걸 더 봐야지, 지금이라도 이걸 찾아봐야지 하는 식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이 의미가 있었다. 이 책 안에서 '영희네 가족', 그 가족보다는 김영희 님의 삶이 진짜 계속 기억에 남는다. 모든 돌봄을 책임지고 있는 그분의 어깨가 계속 그려지면서 "아, 언젠가 이 사람의 삶 자체가 평안해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궁극적으로 한 것 같다. 


하영 중간중간 너무 열변을 토한 것이 아닐까 하고 반성하고 있다. 나는 직업적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만나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입장이다 보니 이 책이 정말 귀하다. 이 사태를 분석하는 칼럼이나 기사는 인터넷상에서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지만 매우 단편적으로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처럼 돌봄부터 시작해 의료와 민주주의까지 백서처럼 다루는 책은 별로 없다. 다음 학기엔 학생들에게 이걸 읽혀보고 싶은데 학생들이 오늘 우리가 했던 수준만큼의 얘기를 할지가 나에게는 도전 과제인 것 같다. 


수하 나는 지구에서 살 거라면 인간 숫자는 줄여야 하고, 재야생화를 적극적으로 해서 인간의 컨트롤 안에 있는 영역, 인간의 서식지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주의를 가지고 있다. 지구의 다른 생물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야생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넓혀야 한다는 주의다. 그런데 야생화를 적극적으로 한다는 것은 인간과 바이러스 접촉이 더 많아진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아서, 인간에게 위험을 촉발할 가능성이 더 커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지는 않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인간이 멸균에는 정말 재능이 있어서, 산업화와 근대의 위생 개념이 들어서면서 미생물의 미시 생태계도 다 망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근대 사회의 위생 기술 도약은 사실은 근본적으로 많은 생물을 망가트렸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인간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재야생화에 적극적으로 더 동참하면 안 될까 생각한다. 나는 인간 편이 아닌 것 같다. 


상욱 아까 물고기 님이 거슬렸던 구절에 대해 지적해주셨는데, 나는 그 구절을 전혀 멈춤 없이 쭉 읽고 내려갔었다.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휘발되어 버릴 수 있었던 부분에 대해 다른 분들의 고민과 문제 제기, 생각들을 만나볼 수 있어 배움이 되었던 것 같다. 코로나 상황을 맞으면서 안 그래도 좁았던 영역이 더 좁아지고, 계속 비슷한 생각을 하는 어떤 케이지 속에서 맴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나와 다른 이점과 관점을 접하게 되어 좋았다. 


지선 오늘 책모임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사람이 어떤 환경,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같은 팬데믹이더라도 서로 경험하는 것이 굉장히 다른 것 같다는 것이다. 그동안 뉴스나 정제된 정보로만, 혹은 인터넷을 통해 뭉뚱그려진 정보로만 얻었던 것을 개개인의 이야기로 하나씩 듣게 되니까, 많은 사람에게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동선 공개’에 관해 관심이 굉장히 많았다. 코로나 발생 거의 초기, 거주 지역에서 동선 공개 관련 문제가 있었는데, 그전까지는 그저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던 사람들이 ‘굉장히 내 가까이에 있구나’를 생각하게 되었던 계기가 된 것 같다. 소수자였던 사람들은 확진자가 되면서 또 다른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부여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가 격리를 끝내고 다시 사회로 복귀를 했을 때, 그다음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이 많아 동선 공개 주제가 나오자마자 말을 보탰다는 맥락을 설명하고 싶었다. 


뭉 코로나로 인해 불거진 여러 지점 중에서도 내가 처음 불안을 느꼈던 것은 바로 ‘다른 의견들에 대한 차단’이었다. 동선이 조금만 어긋나도 큰일 날 것처럼, 죽일 놈인 양 구는 것. 조금 다른 의견일 뿐인데 굉장히 큰일인 양 다루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위험하다고 느꼈다. 상황이 이렇게 극한으로 가니까 이렇게 극단적으로 되는구나. 그러면 ‘누군가는 굉장히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오늘 다양한 의견들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상은 이 책을 통해서, 지극히 알고 있었고 당연한 거지만, 단편적이고 분산적으로 생각해 놓쳤던 부분들을 하나로 모아서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를 갖게 된 것 같다. 9 챕터의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 ‘서로가 서로의 돌봄을 받아 가면서 같이 살아간다는 것’도 정말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로만 들리기도 했다.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도 있어야 하고 뭔가 구체적인 방안들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낭만적인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함께 더 고민할 수 있을지 앞으로 더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물고기 이렇게 많은 인원으로 한 것도 처음이고, 또 온라인으로 한 것도 처음이어서, 시간 배분이나 발언의 기회를 충분히 나누는 부분에 있어서 좀 부족했던 것 같다. (반성) 

완전히 동의 안 되는 이야기도 나오고,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도 나오는 것이 토론 모임의 가장 좋은 점이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다음 주에 또 이대로 뵐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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