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일기 71호

by 그럼

단골 M님이 주문을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건넸다. 빨간 자두다. 외가에서 직접 기른 것이라고 했다. 며칠 뒤, H님도 흔들흔들 들고 온 봉지를 그대로 카운터 너머로 주었다. 이번에도 키운 자두다. 갑자기 자두가 풍년이었다. 그렇다면 자두라떼를 한 번 개발해볼까 싶었다. M님에 뒤이어 들어온 하늘연달님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어 선물이라며 툭 놓고 갔다. 이렇게 손님에게 깜짝 선물을 받을 때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도대체 어디다 두어야 할지. 돈을 받고 서비스를 내었을 뿐인데—물론 감사를 담아—이렇게 선물을 챙겨서 먼 걸음 들고 와 건네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바보같이 머리로 헤아려보려 한다. 과연 직접 기른 자두는 시지도 않고 달달했다. 이런 맛과 향이었다, 그 마음은. 참 감사한 직업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7월부터 저녁 장사를 시작했다. 직장인들이 찾아오리라 예상했지만—바라는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아직까지는 학생들이나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들르는 사람들이다. 저녁 손님이 뜸해 아내를 집으로 먼저 보내고 텅 빈 홀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장사 걱정에 낭만은 5분을 넘기지 못한다. 8시 반 음료 마감을 시작할 때까지도 그렇게 조용히 손님인 척 있었다. 마감 설거지를 미리 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내다보니 중년의 남자 손님이 종이컵을 홀짝이며 서가를 둘러보고 있다. 맞은편 카페들이 일찍 문을 닫아 밖은 컴컴했다. 쥐죽은듯 조용했던 곳에 갑작스럽게 사람이 거기 있었고 깜짝 놀라 씻던 컵을 놓칠뻔했다. 그렇게 손님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입에서는 '어떻게 오셨냐'는 수상한 물음이 나왔다. 손님에게 왜 왔냐니. 그는 그저 책방에서 책구경을 하는 중이었다. 카페인가요? 책방인가요? 그는 가게의 정체성에 의구심 섞인 감탄을 하면서 떠났다. 아내 혼자 마감하면 무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웬만하면 마감은 같이 하는 게 좋을 듯했다. 절대 내가 무섭기 때문이 아니다.



로레 사장님이 오랜만에 와서 이번에도 노란 책을 사갔다. 그가 노란 책을 사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동요 '가을길'이 재생된다.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트랄 랄랄라 트랄 랄랄라 노래 부르며'.



매주 돌아가며 로또를 사는 모임이 있다. 친구처럼 친한 동생 둘과 아내까지 네 명이다. 술자리 재미로 시작한 게 아내와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이게 도대체 몇 년째인가. 이제는 빠질 수도 없다. 매몰비용의 오류라기보다는 FOMO에 가까운 듯하다. 로또 일등 상황 발생 시 우리의 미션은 그 길로 남산 반얀트리에 모이는 것이다. 그렇게 반얀트리는 돈이 있어도 가면 안 되는 성지가 되어버렸고, 그간 로또 살 돈을 모았으면 그곳에 가고도 남았겠다는 말은 금기어가 되었다. 그새 나도 결혼하고, 동생 한 명도 결혼했다. 제수씨는 언젠가 우리 얘기를 듣고는 그렇게 오래 했는데 소식이 없다니 이상하다고 했다. 그렇게 오래 한 것이 이상하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사실 로또 당첨은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재밌는 술안주 거리, 농담 소재였지만 그러기에는 이제 각자의 삶이 너무 바빠져 버렸다. 장사를 시작하고 나니 친구들 만나기가 어렵다. 매주 안부를 묻는 와치독 타이머가 돼버린 로또가 더 좋은 건지 모르겠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오랜만에 북하울 손님이 왔다. 분기에 한 번꼴로 강림하는 듯하다. 아직 데이터가 적으니 확실하지는 않다. 가게들이 그렇게 많은데 장사의 신은 이름만큼이나 부지런한 모양이다, 이렇게 또 오시다니. 그 눈부신 손길이 오래 머물도록 꼭 쥐어 보았다.

장사는 날씨에 큰 영향을 받는다. 추우면? 손님이 없다. 더우면? 손님이 없다. 눈이나 비가 내리면? 역시다. 드디어 날씨가 좋으면 나들이 사진들이 피드를 채운다. 요즘은 애매한 날씨가 좋다.

그야말로 불볕더위였다. 이렇게 더운데 누가 밖에 나올 생각을 할까. 그럼에도 찾아오는 손님이 감사하면서도 놀랍다. 이 와중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밖에 나갔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스타벅스 그늘로 사람들이 복작이며 모여있다. 여러분 우리 가게도 안전합니다. 너무 뜨거워 나도 잠시 들어갈뻔했다.

자영업 폐업자수가 처음으로 백만이 넘었다는 기사가 났다. 우리야 경기 좋을 때가 어땠는지 모르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감이 없다. 경기라는 게 이렇게 쉽게 눈에 띄는 것인지 몰랐다. 배부르게 살았던 것일까?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책방으로 돌아오니 유리창에 커다란 낙엽 같은 것이 붙어있다. 나뭇잎이 아니라 크기가 손바닥만 한 파란 나비다. 자연에서 보기 힘든 영롱한 새파란색이다. 털이 복슬복슬한 게 나방 같기도 한데, 날개를 접고 앉았으니 나비인가? 기쁜 소식처럼 앉아있다, 파랑새 마냥. 길접吉蝶인가 싶었다. 경기가 좋았을 때가 있었다고 하니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


제 팔을 씻지 않을 거예요—당신이 스카프를 선물해 준—아몬드 같은 갈색의 팔을—당신의 손길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에밀리 디킨슨 「결핍으로 달콤하게」



인스타 포스트를 올릴 때마다 열심히 좋아요를 눌러주는 계정이 있다. 며칠 전 그게 단골 J님의 계정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출판계에서 일한다는 그는 책방 오픈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책을 주문해 주시는 고마운 손님이다. 대부분 직접 그린 그림으로 채워진 피드를 신기해하며 구경하는데 중간에 상패 사진이 하나 올라와 있다. 신인문학상 상패였다. 놀랍게도 그는 2년 전 문예지로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절판된 문예지를 중고로 구해 예약 도서를 찾으러 온 그에게 사인을 받았다.

금요독서회가 있는 날이다. 독서회 시작을 30분도 남기지 않았는데 취소자가 속출했다. 다행히 남은 두 분이 흔쾌히 참석 의사를 밝혔다. 한 사람은 이름을 알고 있던 역시 초기부터 찾아준 단골손님이었고, 다른 참석자도 몇 번 찾아주어 얼굴을 익히고 있던 손님이었다. 사람이 적으면 오히려 더 편안하게 대화가 이어진다.

나는 J님의 수상작을 읽었다. 제목은 '영원한 세계'. 단편이다. "물고기는 방파제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라는 흥미로운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이 낚시를 한 모양인데 낚싯대가 없다.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던 연인이 떠나면서 가져가버렸다. 이별한 모양이다. 그녀는 커다란 물고기를 양손으로 들고 해변도로를 따라 걷는다. 마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길고양이가 뒤따른다. 귀여운 로드무비 같았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이 이상하고 그들과의 대화도 기이하게 흐른다. 남미 환상문학 같은 분위기로 바뀌고, 약간은 몽환적인 느낌으로 기묘한 하루 이야기가 끝난다. 다시 책 제목으로 돌아간다. '영원한 세계'. 무엇이 영원할까. 이 이상한 세계에서의 하루는 주인공의 내면세계일지 모른다. 이별의 상처가 감각을 왜곡시켜 묘하게 비틀린 세계인 것이다. 우리도 그러지 않은가. 감정을 곱씹게 되는, 마음 한 구석에 갇혀 영원히 재생되는 그때 그 순간들. 기억과 환상과 착각이 뒤섞여버린 하루. 책방을 열고 지금까지의 수백일이 하루처럼 다가온다. 아득하면서 온갖 빛깔을 띤, 나에게만 유효한 기이함으로.

사인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는 J님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쪽지글 같은 사인을 해주었다. 오타도 있다. 겸연쩍어하는 그를 보니 그 메시지가 더욱 진심으로 느껴졌다. 리멤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일단은 잘 싸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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