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이 아니네요?

책방일기 74호.

by 그럼
오늘은 정말 이상한 일 투성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여느 때와 똑같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내가 변했나? 가만....,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가 어땠지? 여느 때와 똑같았나? 기분이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만약 내가 달라졌다면 대체 난 누구지? 이건 엄청난 수수께끼야!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8월 19일 화요일.

인스타로 친밀감을 다지는 사이인 옆 도시 책방 대표에게 DM이 왔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언젠가 그 책방에 놀러 가서 얼굴 한 번 본 사이, 인스타를 통해 보는 그 책방의 겉모습이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다. 이것이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이 우리와 세계를 매개하는 새로운 시대의 인간관계인가, 갑자기 미래가 혹은 내가 모르는 현재가 가까이에 왔나 싶었다. 당황스러움과 무서움, 안쓰러움이 복합적으로 밀려왔다. 얕잡아보였나 싶다가도 오죽했으면 나에게까지 부탁했을까 하는 마음. 그 책방을 지켜보며 어쩌면 저렇게 잘할까 부러웠다. 무섭게 성장하는 듯한 겉모습이 전부가 아닌지 몰랐다.

인스타 눈팅을 하는 또 다른 책방이 있다. 또렷한 컨셉으로 자신만의 색을 채워나가는 브랜드였다. 언젠가 책방지기가 개업 1년의 소회를 밝히는 영상을 올린 적이 있다. 반짝반짝한 겉보기와 달리 미래가 밝지 않았다. 얼마나 아등바등 꾸려나가고 있었는지, 책방지기가 겉멋에 취한 철없는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가 막힌 기획을 내놓는 책방, 작가들이 모여드는 책방, 각종 모임이 끊임없이 열리는 책방, 개성 뚜렷하고 아이디어가 톡톡 튀는 모든 책방들, 다른 업의 멋진 브랜드들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나는 화려한 이미지의 외양만 정신없이 쫓고 있는지 몰랐다. 내가 잘하는 게 무얼까, 그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 8월 22일 금요일.

전 직장에서는 점심시간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KT는 외출 금지령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어느 날은 물 흐르듯 떼를 지어 흘러가면서, 또 어떤 날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물이 콸콸 흘러야 물줄기라도 틀어볼 텐데. 하긴 자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신나게 떠들 수 있는 것 같지도 않고(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서가를 보고 기겁하며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커피 맛이야 취향이니 그들을 무슨 수로 잡겠는가.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이란 단순히 밥 먹는 시간 이상의 휴식시간일 텐데, 각 잡고 앉아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테이크 아웃을 늘리기도 쉽지 않다. 어차피 가격 경쟁일 텐데, 커피 맛은 포기할 수 없다.



# 8월 23일 토요일

저녁 8시가 넘어 텅 빈 책방에 한 외국인이 들어왔다. 이제 막 휴양지에서 돌아온 듯한 여유로움이 풍기는, 남유럽 혹은 남미 출신 사람 같다. 하얀 피부에 갈색 곱슬머리, 동네와 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패션, 느닷없이 일상을 찢고 나타난 지브리 남주 같은 그로 인해 책방은 잠시 신비로움을 풍겼다.

따뜻한 라테 한 잔을 주문한 그는 안쪽 구석에 앉아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다. 왜인지 딱한 사정을 상상해 버렸고, 컴컴한 바깥 골목과 어우러진 그가 무척이나 외롭게 보였다.



# 8월 24일 일요일

자주 오는 단골손님. 볼 때마다 반가우면서도, 그녀의 뜨거운 사랑이 식을까 봐 걱정이다. 언젠가 끝이 있을 텐데, 실망할 일이 생길 텐데.

감정이 느슨해지면 없는 두려움까지 만들어 스스로 학대하는 중이다.



# 8월 25일 월요일

동네 처음 가보는 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은 깔끔하고 단정했다. 수저 포장지부터 음료 냉장고까지 브랜드 이미지로 잘 정돈한 실내가 편안함을 준다. 벽에는 커다란 두 장의 패널이 붙어 있다. 한쪽에는 밀가루가 잔뜩 묻은 손으로 칼국수 면을 만지는 사진, 다른 쪽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다란 솥에서 맑은 국물을 국자로 부어내는 사진이 있다. 일본의 음식 장인들은 최고의 음식을 만들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재료를 손질하고 기술을 갈고닦는 일을 수십 년간 꾸준하게 해내지 않은가. 책 옮기고 커피 내리는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고단해하고 하루하루 일희일비하고 있는지, 숏폼처럼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Play long games. 멀리 길게 보자고, 칼국수를 먹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8월 26일 화요일

스트레스 테스트. 시스템의 안정성을 확인하고 품질을 검증하기 위해 각종 부하나 극한 상황을 미리 시뮬레이션해 보는 공학 용어다. 그런 날이었다. 온갖 케이스를 들이대는.

동네책방은 대부분 견본 없는 판매용 도서만 구비해 놓는다. 대형 서점처럼 출판사에 반품할 수도 없고, 손실로 처리할 자본도 규모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테스트의 압권은 판매용 도서를 자리에서 읽는 손님이었다. 열람용 도서 안내를 못 들은 모양이다. 보통은 서로 미안해하지만 매우 언짢은 표정의 손님은 대답했다. "서점이 아니네요?" 안내를 무시한 모양이다. 다른 서점은 책을 보게 한다고 했다.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책방이 아니었다? 난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정체성을 부인하는 그 한 마디에 그동안의 시간을, 노력을, 다짐을 모두 부정당하는 그런 기분. 불안의 대상이 사람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뇌정지가 온 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순간 내가 꺼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너 안된다고 했잖아, 아니라고 했잖아. 공간의 룰과 매너는 누가 만들고 지키는 것인가. 서비스의 정의는 누가 내리는 것일까. 돈이 내리는 걸까?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거짓말쟁의 역설을 입력받아 작동을 멈춘 로봇마냥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굳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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