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인증

책방일기 75호

by 그럼

# 9월 6일 토요일.

손님이 별로 없는 한가로운 오픈 초반이었다. 하지만 책방 밖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침부터 비가 무섭게 쏟아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뚝 그치기를 반복했다. 그냥 소나기가 지나가는 정도가 아니다. 주위가 컴컴해질 정도로 짙은 먹구름에서 샤워 줄기 같은 굵은 빗물이 쏴아 몰아치다가, 갑자기 전등 스위치라도 누른 듯 해가 쨍하게 비치는 식이었다. 온·오프. 디지털 시대의 빗줄기.

오른쪽 창가자리 구석에 앉은 손님이 카운터를 돌아보더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천장을 가리켰다. 궂은 날씨를 피해 왕벌이라도 들어왔나 싶었다. 그럴 땐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 다음 밖에 풀어준다. 청소기를 바로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홀로 나갔는데... 아니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다. LED 매립등 틈으로 물이 똑똑 떨어지고, 테이블 위에는 물이 흥건하게 고여있는 것이었다. 서둘러 걸레로 닦아내고 대야를 받치고 사다리를 놓아 LED 구멍을 살폈다. LED 등을 구멍에서 뺄 때는 영화처럼 물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안쪽을 마른걸레로 훔쳐냈더니 물이 더 떨어지지는 않는 듯했다. 장사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왕벌이 그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왼쪽 창가자리 구석에 앉은 손님이 부른다. 이번에도 LED 매립등 틈으로 물이 떨어졌다. 한쪽을 막으면 반대편에서 새는, 시트콤인가 싶었다. 양쪽 모두 바로 밑에 손님이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정지해 있는 나에게 손님이 전등 스위치부터 꺼야 되지 않겠냐고 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가 새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더욱 놀랐던 것은 천장 소식을 전하곤 아무 일 없는 듯 다시 태연하게 책을 읽고 뜨개질을 하는 양쪽의 두 손님이었다. 비가 새는 게 평범한 일이었나? 나만 재난 영화인가?

인테리어 소장에게 바로 연락을 했다. 주말 손님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피가 마르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안절부절한 나와 달리 손님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구경조차 하지 않는다. 물이 떨어진 자리의 물통과 급히 작성한 양해 안내문을 보고도 태연하게 바로 옆에 앉거나, 한 아주머니 커플은 비가 그쳤으니 괜찮을 거라며 바로 밑에 앉으려는 것을 내가 말려야 했다. 다행히 그 뒤로 물이 더 새지는 않았다. 소장이 도착해서 건물 외벽과 매립등 구멍을 살피기 시작했다. 약한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돌아보던 소장이—그라고 별 수가 있겠나 싶었지만—건물 외벽에는 통풍을 위한 작은 숨구멍(?)이 있는데 간판 전선줄이 그 앞을 막아 빗물이 구멍으로 역류한 것 같다고 했다. 우선 간단하게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비가 많이 오긴 했다. 한걸음에 달려와 비를 맞으며 살펴준 그에게도 고맙고, 이 난리통 날씨에도 외출을 하는 손님들에게 경외의 마음이 들었다.



# 9월 7일 일요일.

밤새 비가 내린다고 했었다. 아침에 출근해 물이 샌 자리에 놓은 대야와 물통부터 확인했다. 깨끗하게 말라있는 걸 보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 9월 10일 수요일.

대전에 사는 후배가 왔다. 판교에 볼 일이 있어 올라오는 길에 일찍 들렀다고 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같이 앉아 그간의 안부를 나누었다. 다른 선후배와 같이 창업해 운영하던 작은 업체를 홀로 나와 또 다른 업체를 차렸다고 했다. 대표이사라고 적힌 명함을 나에게 내민다. 이제 막 홀로서기하는 회사에는 베테랑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오랜만의 안부도 궁금하긴 했지만, 리쿠르팅도 들른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투자 피칭을 하듯 열심히 회사 소개를 하는 후배 앞에서, 아주 약간의 흔들림도 없었다면 거짓일 것이다. 기술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지식도 스킬도 이제 가물가물하고, 더 미룬다면 체력이 못 받쳐 줄 것이었다. 3초 흔들렸다. 나는 공부하는 삶을, 내면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를 이끄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풍요와 안락함의 유혹에(그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부서질 정도로 얄팍한 것이었나. 좋은 삶을 사는 것,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에게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본다.

가는 길에 후배는 아내와 둘 다 책을 좋아한다며 책을 한 묶음 사갔다. 그는 학창 시절에 문예반이었다고 했다. 시를 좋아하는 그의 마음과 외모가 합쳐져 별명이 '원시인'이었었다고 했다. 웃으면서도 그 마음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은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불쑥 내뱉지 않은 것은 아마도 흘러나올 것 같은 그의 대답이 듣기 싫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소크라테스가 사회생활에 거리를 두고 지성에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은 철학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형이나 추방형을 당할 거라고 위협받았을 때다. 재판, 투옥, 처형은 소크라테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시험이다. 그는 국가에 속한 사람이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철학을 사랑한다. 철학이야말로 그의 인생을 조직하는 궁극적 목적이다.
—제나 히츠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



# 9월 19일 금요일

픽사 '엘리오'를 봤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감동적이기는 한데, '역시 픽사야'라는 말을 아내와 나누면서도, 픽사식 클리셰가 돼버린 듯한 식상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후각 순응adaptation, 우리 코는 똑같은 냄새에 대한 피로와 악취에 대한 방어 생리가 있다. 오래 맡으면 감각이 둔해진다. 순응해 버렸을까. 픽사가 픽사했다는 말은 칭찬이기도 하지만 무엇에든 쉽게 질려버리는 우리의 변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매번 새로움을 주기란, 꾸준한 혁신을 이루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부드러운 커피 향과 아늑한 공간, 그리고 책. 애니메이션이야 새로 그려내면 되지만, 공간은 쉽게 바꾸기 어려운데, 어떻게 그 신선함을 오래도록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뻔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 9월 23일 화요일

경기도에는 '지역서점 인증제'라는 제도가 있다. 도내에서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 서점에 대해 심사와 현장 실사를 거쳐 서점 인증서를 발급하는 제도다. 인증을 받으면 각종 사업이나 정책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가장 큰 혜택이라면 무엇보다 도서관 도서 납품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책방을 열기 전 분당도서관의 '지역서점 바로대출' 서비스를 종종 이용했었다. 서비스 협약 서점이 되려면 역시 '지역서점 인증'이 필요하다. 책방을 준비하며 인증받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았으나 자격 요건 중 '1년 이상 영업' 기준 때문에 신청을 못하고 있었다. 사업자 등록일 기준 딱 1년이 지난 시점에 마침 25년 하반기 접수 공고가 올라왔고, 긴 심사 끝에 드디어 인증을 받았다. 아쉽게도 지역서점 바로대출 참여 신청은 상시모집이 아니었고 내년을 기다려야 했다. 책을 팔기 위한 커피 매출이 오히려 책 판매 비중을 뛰어넘으니 정체성에 혼란이 올 때도 있다. 책방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책을 읽고 있던 단골 연달님이 잠깐 밖으로 나와보라고 했다. 하늘을 보라고 했다. 비가 갠 뒤의 맑은 하늘. 페인팅 나이프로 흰 물감을 찍어 죽 그은 듯한 긴 가로 세로 선들이 하늘을 나누고 있었고, 중간중간 두꺼운 붓 자국이 추상화처럼 칠해져 있었다. 정말 그림을 그린 듯한 기이하면서도 경이로운 하늘이었다. 덕분에 낮아진 가을하늘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렇게 가끔 하늘 한 번 보려고 사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책방에서는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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