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26일 토요일.
캠프캡을 눌러쓰고 얇은 테의 안경을 쓴 스키니 한 남자 손님이 들어왔다. 개발자 devaslife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주문을 하고 얼마 뒤 그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한 손에는 서가에서 가져온 책 한 권이 들려 있었고, 그 책을 가리키며 자신(출판사)의 책을 입고해 주어 고맙다고 했다. 책방 겸 독립출판사 '오혜'의 대표인 유재필 작가였다. 물론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이름과 브랜드로만. 인스타를 팔로우하고 그의 공간과 브랜드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가 책방 문을 닫은 것도,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소식도 그래서 알고 있었다. 근처 지인을 만나러 왔다가 들렀다고 했다. 우리 책방에 와 보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갑자기 팬이라고 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내적 친밀감만 열심히 적립했을 때의 부작용이었다. 그는 나가면서 자신의 책 한 권을 선물로 주고 갔다. 책방에 들인 독립출판물 중 작가가 직접 내방하여 입고하는 일이 있다. 그렇게 받은 책을 읽으면 작가가 직접 읽어주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린다.
# 5월 1일 목요일.
카운터로 짙은 인상의 낯익은 남자 손님이 걸어왔다. 짧게 민 머리에 진한 눈썹, 거뭇거뭇한 수염 자국의 선이 굵은 얼굴이다. 책방 대표님이냐고 묻길래 누군가 했더니 '섬과 달' 출판사의 이승학 대표였다. 아침 일찍 도서를 주문했는데 직접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와는 직거래로 책을 들이고 있지만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다. '섬과 달'은 팀 오브라이언의 작품들을 위시한 영미소설들을 그가 직접 번역하여 출판하는 1인 출판사다. 그 책들을 좋아해 오픈 때부터 서가 한편에 출판사 코너를 차렸다. 그의 책들을 읽는 것은 한결같이 강렬한 경험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그 이야기들에는 내가 묻고 싶은 삶의 질문들이 있고 발견한 깨달음들이 있다. 기쁨과 여운이 계속 가슴속에 남는다.
웹에 돌아다니는 한 장의 사진으로만 얼굴을 익혔던 터라 낯이 익은 모양이었다. 바로 못 알아보아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는 것을, 그의 머리카락 때문에 못 알아본 마냥 적은 머리숱을 지적하는 무례한 짓을 해버렸다. 시커먼 머리칼의 사진은 젊었을 적 사진이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내적 친밀감이 이렇게나 위험했다. 그는 워커 퍼시의 '영화광The Moviegoer' 원서를 선물로 주었다. 이창동의 소설집도 사갔다. 감사한 마음에 커피를 드리며, 실수를 만회하고자 그의 출판사 코너를 자랑스레 선보였다. 책을 더 열심히 팔아보겠다고 다짐했다. 팀 오브라이언의 신작은 번역이 거의 마무리되었고 여름에는 나올 모양이었다. 기다려지는 기쁜 일이 하나 생겼다.
# 5월 11일 일요일.
마지막 손님이 나갔다. 아내에게 마감을 부탁하고 먼저 가게를 나섰다. 친구 Y와 H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건설회사 해외파견 근무를 하는 Y는 계절에 한 번씩 휴가를 나온다. 오랫동안 사귄 고등학교 친구지만 반가움은 계절이 바뀌어도 시들지 않는다. H의 사무실이 있는 옆동네 보쌈집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겨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별로 특별할 것 없지만 이상하게 재미있는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근한 봄밤 공기가 물폭탄처럼 거리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조금 걷고 싶었지만 최근 운동을 하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친 H가 이제 막 깁스를 푼 참이었다.
우리 인생도 이제 오후의 정점을 지나가고 있었다. H는 사라지는 거래처와 점점 줄어드는 일거리에, 어느덧 18년차인 Y는 음산한 회사 분위기에, 미래는 위태롭고 암울하게만 보였고 추억과 아이들로 이야기를 몰아갔다. 친구의 아이들은 쑥쑥 자랐고 Y의 큰 아이는 어느새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싱그럽던 시절의 턱밑까지 자라있었다. Y가 아이 없이 제 삶 하나만 건사하면 되지 않겠냐며 일찍 나와 자기 일을 시작한 내 처지를 부러워했다.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내 형편을 열심히 하소연해도 그들 앞에서는 그저 엄살꾸러기였다. 편의점 업계가 역대 처음으로 성장세가 꺾였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수 부진 때문이었다. 장사가 어려운 것이 꼭 내 탓만은 아니라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Y는 이틀 뒤에 다시 떠나 여름의 끝자락에야 돌아온다고 했다. H의 발목 재활은 수개월은 걸리는 모양이었다. 다음 계절에 만났을 때는 몸도 마음도 다시 나아지기를, 우리의 대화가 우리를 미래로 이끌기를 바랐다.
# 5월 13일 화요일.
날씨가 나쁘지 않았다. 계엄이 선포된 것도,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하한이라고 생각했던 역대 최저 매출의 절반도 안되는 처참한 숫자가 찍혔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사태가 말끔히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고, 망연자실했고, 걱정보다는 허탈함이, 놀람보다는 헛웃음이 나왔고, 무력한 기분은 곧이어 부끄러움과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심한 현실은 묵묵히 제 태엽을 감고 있는데, 탓할 거리를 찾으려는지 숨은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닌지 숫자를 뒤적이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책 한 권 못 판 것은 당연했다. 치즈케이크를 만드는 날인데 마침 계란이 떨어져 못 만든 게 다행이라고 아내가 혼잣말을 한 것 같다. 홀에 나가 책을 읽었다. 거리는 침묵으로 시끄러웠다. 창문을 기는 벌레는 눈치를 보면서 살금살금 걷는다. 참새만 한 작은 새가 화분 끝의 가느다란 이파리에 날아와 앉았다. 처음보는 화려한 무늬가 직박구리 같지는 않다.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 두리번거리며 가게 안을 살피고는 다시 날아간다. 섬뜩한 냄새를 맡았는지 모른다. 눈치 없는 해만 바닥에 갖가지 그림자를 그리며 놀고 있었다. 서가의 책들은 책장 위로 녹아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어색함 사이에 비집고 앉아있는 듯한 손님 한둘의 존재도 지워졌다. 우리 둘만 남겨진 것 같았다.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연휴에 최후의 축제라도 벌인 것처럼.
다 차지 않은 쓰레기통을 비우고, 분리한 재활용품을 모조리 내놓았다. 더 싹싹 비우고 더 박박 닦았다.
불안하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었다. 쓰린 속을 매콤한 떡볶이로 탓으로 돌리며 NBA 플레이오프 경기를 봤다. 워리어스는 4차전도 내주었다. 플옵지미는 보이지 않고 시리즈는 이미 끝난 것 같다. 꺼버리고 '스타워즈 안도르' 새 에피소드를 봤다. 제국의 횡포는 날로 심해지고 은하계 민중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안도르'는 '로그원'과 오리지널 스타워즈로 이어지는 프리퀄이다. 타투인에는 곧 두 개의 태양이 뜰 텐데.
그대로 있다는 말은 오랫동안 쓸쓸했지
통증처럼 미래가 온다
천천히 망가져 가는 기분
인간들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몸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차유오 「멈춰버린 인간들」 『순수한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