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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Apr 18. 2023

비가 오는데 외벽 청소하기

신도시 사는 80년대생 아줌마


비오는 아침.


아들은 30분이 넘도록 차려주는 밥상 앞에서 씹다가 멍때리다가 재촉하면 또 한 입 넣고 있다.

스물스물 내안의 괴물이 불을 한번 뿜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차오른다.

오늘은 소리지르지 말아야지.

이를 앙다물고 음악소리를 민폐가 될 것같은 데시벨로 올렸다.

35분에는 나가야하는 아이가 40분이 지나는데도 고양이와 장난치느라 씻지도 옷을 입지도 않는다.

그 꼴을 보고 있다가.


“너는 시계를 볼 줄 모르나보구나!”


하며 빈정대사를 시전하였다.


이렇게 시작하면 결국엔 아이와 말싸움에 벌어지고 학교 때려치고 집에서 쓰레기처럼 살라고 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눈도 질끈 감았다.

근데 아이의 행동이 궁금했다.

쇼파에 있는 담요를 뒤집어 쓰고 뚫어진 그물같은 구멍으로 아이의 행동을 보았다.

아이는 눈치를 슬슬 보더니 내 옆에 앉아 양말을 신는다.


“엄마 지금 죽을힘을 다해서 참고 있으니까 빨리 학교 가줄래?”


아이는 본인이 싫어하는 윗옷을 입기 싫다고 한마디 내뱉고는 눈칫껏 입고 학교가방을 메었다.

내게 사랑한다고, 고양이에게 사랑한다고 손하트를 잊지 않고 등교하였다.


휴우…

드디어 갔다.

그 녀석이.


내게 시험에 들게 하는 자들 중 가장 빈번하게 가장 현실적으로 화를 치밀게 하는 존재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내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내 아이라는게 참 아이러니하다.


창밖을 보았다.

우산도 없이 보슬비를 맞으며 학교에 간 모양이다.

주차장 출입구 천장을 물청소 하는 아저씨가 보였다.


‘비오는 날 물청소!’


좋다.

비오는 날 청소하기 딱 좋다.

쨍한 날은 만사 재쳐두고 아니 이불만 하나 빨아 널고 나가 놀아야 한다.

그러나 비오는 날은 왠지 미루고 미뤘던 무언가를 정리하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


아이의 책수레가 거추장스러워 방에 밀어 넣고 온갖 잡동사니를 실어 나르는 것으로 전락해 있는 걸 몇달째 보고 견디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요놈이다.


수레에 무임승차한 모든 쓰레기들을 바닥으로 내리고 물티슈로 흔적을 닦았다.

고양이는 새로운 공간에 흥미를 보이며 냉큼 수레에 올라탄다.

요놈스키…호기심 한창일 때라 그냥 귀엽게 봐주기로 한다.


문제집을 사뒀는데 노느라, 학원숙제 하느라, 내가 일방적으로 내민 책들이라 안 풀고 새 것이 책들이 많았다.

일단 그 아이들부터 수레 맨위에 실어 눈에 띄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케아에서 사둔 플라스틱 바구니에 섹션별로 담았다.

석 달 넘게 방치한 쓰레기 수거함 같던 수레가 이제 20분만에 다시 책수레로 변신하였다.

인간이란…시간에 응석부리고 영원할 것이라 믿어 자꾸 뒤로 미루는 어리석은 자라 수동적이고 게으로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가 오는 오늘은 내 의지가 승자다.


수레의 맨 아래칸에 어느새 고양이가 탑승해 또아리를 틀고 있다.

토실토실한 녀석의 몸뚱어리가 귀엽다.

그대로 수레를 밀어 칙칙폭폭 입으로 소리를 내어 원래 자리인 식탁 옆에 두었다.

식탁이 2미터짜리라 주방을 상당히 넓게 차지 하는 그 옆에 수레가 있는 모습은 참 답답하게 그지 없지만 아이가 크는 동안에는 지저분해도 책들에 여기저기 보이도록 하고 살기로 했다.

아무리 책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도 안읽는 놈은 끝까제 안읽지만 그래도 나도 끈기있게 전시하는 어미다.


비가 오는 날엔 어디 꼼짝도 하기 싫다.

고양이는 평소에 잘 가지도 않는 노란 쿠션에 몸을 파묻고 주무신다.

이 아이도 비가 오면 포근히 감싸주는 어딘가를 본능적으로 찾는 모양이다.

그럼 나는 침대위로 가야하나.


성격상 침대 위에서 뒹구는 게 하루 이틀 지나면 인생을 허비했다는 죄책감에 못이겨 차라리 쇼파에 누워 티비를 보다 잠에 드는 쪽을 택한다.

우리집은 사실 포근한 구석이 잘 없기도 하다.


아이가 곧 학교에서 올 시간이 되었다.

집안이 또 없던 게(엄밀히 말하면 있던게 거실로 나온거지만) 생긴걸 보며 좋아할 것이다.

나는 수학문제집을 디밀며 숙제하기를 종용하겠지.

아이는 싫다고 하면서도 꾸역꾸역 내 말을 들을 것이다.


언제까지 아이를 내 통제하에 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물건만큼은 내가 제어할 수 있음에 그것에라도 감사해야하나 싶다.


사실 비오는 날엔 하고 싶은 것 보다,

하기 싫은 것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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