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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라 Oct 30. 2020

코끝에서



소연은 잊고 싶은 향기가 있다.
아카시아인지, 라벤더인지. 특히 섬유 조직에 촘촘히 박힌 채 체취와 어우러져 흘리듯 코끝에 도착하는 향기를 잊고 싶었다. 소연은 안도하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기억 속에만 맴돌던 향기였으므로. 혹시 준비되지 않은 어느 날 그 향기를 마주하더라도 지금을 실망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준비 또한 단단히 틈틈이 하고 있었으므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신입 직원과 악수하며 소연의 코끝을 스친, 그의 남방에서 풍기던 섬유유연제 냄새. 소연은 불러들여졌다. 아카시아, 라벤더, 봄밤의 향기, 그의 체취, 누군가들의 열망이 한 데 뒤섞여 들끓던 그때로.


새해가 시작되면서 소연의 마음은 덩달아 분주해졌다. 곧 서른을 맞이해야 하는 부담, 그 부담을 정면으로 끌어안기 전에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소연은 캐비닛 구석에서 종이뭉치를 꺼내 들었다. 꽤 오랫동안 소연이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시나리오였다. 다음날, 소연은 충무로에 위치한 영상원에서 진행하는 ‘시나리오 작법 입문’이라는 6개월 과정의 수업을 신청했다. 신청과 수강의 기회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간단한 시나리오를 제출했고 며칠 뒤 축하합니다, 합격입니다.라는 내용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소연은 그날 사직서를 제출했다.

모든 첫날이 그렇듯 강의실은 묘한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이내 간단한 각자의 소개를 나누었고 수업 커리큘럼의 소개, 영상원을 졸업한 선배들의 성공 후기 같은 내용의 영상을 보는 순서로 오리엔테이션이 이어졌다. 자신을 조교라고 소개한 여자는 입학 첫날이라 뒤풀이가 준비되어 있으니 영상원 앞 감자탕 식당으로 이동하라고 안내했다. 마치 대학 신입생을 대하듯, 여기서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모두 편할 거예요.라는 식의 오묘한 위압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장소, 메뉴는 분명 조교가 정했을 테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첫 식사 메뉴가 감자탕이라니. 왠지 내키지 않았지만 대학교 입학 전 그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참석하지 않은 오리엔테이션으로 한 학기 내내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난 물에 빠진 고기 안 먹는데.’
감자탕 가게에 들어서니 테이블마다 깻잎과 들깨가루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냄비가 놓여 있었다. 소주와 맥주, 술잔도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영락없는 신입생 환영회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땐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한 병맥주가 줄지어 놓여 있다는 것뿐이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머뭇거린 탓에 자리는 먼저 온 사람들로 거의 다 채워져 있었다. 소연은 테이블 끝에 앉아 누군가를 잠시 찾는 듯 고개를 기웃거리다 이내 포기해버렸다.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귀엽다고 생각할 찰나, 소연의 앞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그 사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보고 소연이 생각했었는데.
‘우리가 깊어졌으면 좋겠다.’
소연은 그제야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머뭇거린 탓에.

영상원에서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과 시나리오를 써내기 위한 각종 모임이 이어졌다. 자주 만나는 그들 안에 소연과 그 역시 항상 함께였다. 소연을 포함은 그들은 마치 짐승 같았다. 각자 표현할 수 있는 극대치의 감정을 쏟아내고, 그렇게 상대가 부어 내놓은 아픔, 고통 같은 것들을 도로 내 안으로 끌어들여와 몸과 마음 곳곳에 심어놓는 시간을 반복했다. 표현의 도구는 말이었지만 말로는 진짜를 표현해 낼 수 없는, 피부 위의 상처를 그저 핥아 줄 수밖에 없는 짐승들의 몸짓 같았다. 소연은 그를 자주 바라보았다. 소연이 내놓는 말들에 대한 그의 동의가 궁금했다.
아니지, 소연은 그냥, 눈앞에 있는 그가 항상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겨울 외투가 얇은 카디건으로 바꿔 입어야 할 계절이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주 만났다. 그동안 우리가 먹어치운 돼지 뼈랑 소주가 족히 한 트럭은 될 거라고 자랑스러운 듯 시시덕거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돼지 뼈에 붙어있는 살점을 한 젓가락 크게 떼어내어 간장과 겨자가 섞여있는 장에 푹 찍어 입으로 밀어 넣었다. 잔에 찰랑거리는 소주를 마저 털어 넣고선 캬~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소연은 문득 개강 첫날 뒤풀이 메뉴가 감자탕이었다는 것에 심히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 떠올랐다. 물에 빠진 고기를 못 먹는다고 삐죽거리던 마음의 소리도 함께, 피식. 소연은 문득 지루해졌다. 주고받는 모든 대화들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의미가 있어야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떤 일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찾는 소연의 오랜 버릇 같은 일이었다. 소연은 친구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유효함을 찾기 위해서.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그와. 종종. 마주침이 신기했다. 어쩔 땐 소연이 먼저 피했고, 어쩔 땐 그가 먼저 피했다. 그러다 한참을 맞추어보게 되었다. 소연은 그 자리의 유효함을 찾아냈다.
‘우리가 깊어졌으면 좋겠다.’에서 ‘우리가 깊어지겠구나’로 바뀌는 그 순간에서 말이다.

자리를 파하고 친구들은 흔들거리며 다른 술집을 찾고 있었다. 소연과 그는 무리 끝에, 어쩌다, 남게 되었다. 소연과 그의 걸음은 천천해졌고 어느덧 무리와 멀어지게 되었다. 익숙한 공간에 낯선 공기가 가득한, 아직은 밤공기 서늘한 4월이었다. 소연과 그는 대한극장 앞 벤치에 앉았다. 늦은 시간이었던 탓에 주변은 어두웠는데 벤치 옆 자판기만 어색하게 불을 뿜고 있었다. 그는 조금 갈라진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가다듬으려 소연에게 말했다.
‘네가 지루해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어.’
소연과 그는 날이 파랗게 샐 때까지 어제까지의 삶을 꺼내 보이고 서로를 궁금해했다. 소연의 손을 살짝 감싸 쥐는 그의 손에서 심장의 두근거림을, 감정의 들뜸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새벽녘의 파란 공기 냄새와 그의 남방에 배어 있는 꽃향기 비슷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소연의 코끝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부드럽고 뭉툭한 그의 손에서 따뜻한 땀이 났다. 소연은 생각했다.
‘우리의 깊이가 적당하길’


소연은 미팅을 마치고 나오며 신입 직원에게 말했다.
“사무실로 들어가면 퇴근 시간이겠는데요? 바로 퇴근해도 되겠어요.”
“그래도 될까요?”
“이런 건 사수 말 들어주는 게 신입의 역할 아니겠어요?”
“그럼 선배님, 저 저녁 사 주세요. 아까부터 배고파서 혼났어요.”
“... 그럴까요? 경호 씨는 뭐 좋아해요?”
 .....
“저.. 감자탕 좋아합니다! 감자탕 사 주세요!”
제법 선선해진 가을 저녁의 공기가 마치 그 날의 꽃향기 비슷하다고, 소연은 생각했다.
“그래요, 나 맛있는 데 알아요. 가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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