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벽 끓이는 스프에 관하여
샌드위치 숍을 구상하면서 메뉴에 대한 고민이 깊었습니다. 샌드위치숍이니 샌드위치만 팔겠어!라는 배짱은 없었거든요. 그러니 샌드위치 외에 사이드, 커피, 커피 아닌 음료 등등 정해야 할 메뉴가 많았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스프였어요.
여기저기 샌드위치 맛보러 다니며 스프 메뉴가 있는 곳에선 나와의 약속처럼 스프를 주문했어요. 샌드위치를 거의 다 먹고 빵 끝부분을 일부러 조금 남겨 스프에 푸욱 찍어 먹는 맛이 그렇게 좋았어요.
'내가 먹지 않는 건 팔지 않는다'는 식재료뿐만 아니라 메뉴에도 적용되는 필살기 같은 마음이었나 봅니다.
그렇게 저의 샌드위치숍 메뉴에도 스프가 올라갔습니다.
오픈 시간은 평일 9시, 토요일은 10시입니다.
보통 오픈 3시간 전에 출근해서 숨을 헐떡이며 준비하고 나서야 클로즈의 팻말을 오픈으로 돌려놓습니다. 숨 헐떡거림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스프입니다.
아이러니하지요? 샌드위치숍에서 스프가 가장 바쁜 이유라니. 샌드위치는 재료 준비를 '미리' 할 수 있어요. 미리 준비해 놓고 조립해서 만드는 것이 샌드위치니까요. 하지만 스프는 당일 새벽에 끓여 나가야 하는 메뉴이니 오픈준비에 가장 큰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시작하고 나서야 알았어요.
오늘의 스프라는 메뉴명으로 시작한 '이 스프'는 게다가 재료가 매일 바뀝니다.
단호박, 감자, 고구마, 양송이를 매일 번갈아가며 준비해요. (입춘이 지나고서는 토마토도 추가했습니다)
전날 재료준비는 미리 해 놓아야 그나마 오픈 전 3시간 안에 세이브할 수 있습니다.
감자와 고구마는 껍질을 벗겨 얇게 슬라이스 해서 물에 담가 전분기를 빼고 체에 받쳐 물기를 쪽 빼놓아요.
단호박은 오븐에 구워 단맛을 쫘악 끌어올린 뒤 껍질을 벗겨 큐브로 썰어 준비해 놓고요.
그나마 수월한 양송이는 밑기둥을 하나하나 떼서 얇게 슬라이스 해 놓습니다.
그리고 이제 무서워하던 칼질도 늘게 만들어주는 양파 채 썰기와 마늘 다지기까지 해 놓으면 다음날 '오늘의 스프' 밑재료 준비가 끝납니다.
다음 날 새벽 출근하자마자 버터에 양파 볶고 재료 넣고 볶다가 육수(주로 채수) 넣고 익히고 갈아소 우유, 생크림 넣고 또 끓이고 파마산 치즈로 마무리하면 드디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스프.
리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스프의 평가는 참 좋습니다. 어떤 분은 샌드위치보다 더 맛있었다고 합니다.(슬픕니다) 우리 애는 스프 안 먹는데 여기 스프만 먹어요라고도 해주십니다.
레토르트, 분말 스프와는 비교도 하기 싫다는 리뷰도 보았습니다.
이런 리뷰를 보고 듣고 어떻게 그만둬요 스프.
새벽마다 스프를 끓이며 이걸 안 하면 다른 어떤 어떤 것을 할 수 있는데. 같은 생각을 종종 합니다.
동종업계 사장님 약 600명 정도가 정보 나누는 단톡방에 가입되어 있는데, 우연히 스프 이야기가 나왔어요. 질문은 '스프는 어디 거 사용하세요.'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프 어떤 걸 하세요가 아닌 어디 거 사용하세요는, 직접 끓이는 스프는 선택지에 없다는 뜻일테니까요. 여러분들이 여러 제품을 추천하셔서 저도 슬쩍 들어가 보았습니다. 가성비 좋더라고요.
솔직히 솔깃! 했습니다.
제품 사서 원재료 조금 볶고 썰어 올리면 괜찮지 않을까?
남자친구에게 물어봤어요.
어떨 것 같아?
우리는 이미 그렇게는 안돼. 손님들이 우리 스프 맛을 봐버렸잖아.
아.. 그렇지.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오픈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조금 넘었는데 피곤함에 못 이겨 편함에 솔깃했다는 제가 부끄럽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늘도 굽고 썰고 끓입니다.
오늘의 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