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기, 삶이 다시 시작되는 곳

혼란과 소란을 지나마당에서 바라본 노을 한 조각

by Remi

제주에 들어오기 전부터 일이 심상치 않았다.
수속을 막 마치려던 그때, 내 이름 석 자가

공항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보다 가족들이 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엄마 이름이 공항에서

들린 건 처음이라고 걱정반 웃음반이었고 우리를

제주 보내는 남편은 수하물 찾는 곳까지 따라왔다.


“ ○○ 고객님, ○○ 고객님, 수하물 확인 바랍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나의 추측은 30킬로 초과된

캐리어가 터졌을까? 아님 엄마가 만들어주신 반찬이

문제일까? 그런데 모두 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바로 자전거 랜턴과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탄

엄마의 스프레이가 문제였다. 다행히 직원두분이

확인 후 모두 무사 통과되었다.


하지만 산넘어 산, 이렇게 힘든 제주행은 또 처음!
그 와중에 비행기는 한 시간 지연되었다. 아이들도, 반려견도 불편한 기내의자 위에서 점점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기다림 끝에 비행기는 떴지만 마음 한켠엔 왠지 모를 불길함이 스쳤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움직였다.
다행히 탁송 차량은 무사히 제주공항에 도착했고
덕분에 복잡한 절차 없이 바로 제주 집으로 30분 만에 잘 도착했다.



그런데 전국 폭염주의보라는 반갑지 않은 날씨에

당황했고 새벽 5시에 일어난 아이들은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다. 특히 잠 많은 둘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짜증과 함께 ‘제주 입도 신고식’을 날렸다.
짐을 푸는 사이, 화장실 수납장은 ‘우당탕!’ 요란하게 무너졌고, 3개월 비워둔 집은 뜻밖의 손님들ㅡ거미, 날벌레, 그리고 이웃 고양이들로 가득했다. 딸은 그 풍경에 기겁했고 친정 엄마는 정신없이 쓸고 닦고

바삐 움직이셨다. 그와중에 결국 야전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둘째와 짐 푸는 일 도와주다가 자전거로 동네를 씽씽 달리는 첫째.


전혀 예상과 다른 풍경들이 일어났다.
새 집은 낯설지만 첫날부터 걱정투성이가 되면

곤란하니 긍정모드로 우리가 쓸어낸 먼지만큼이나
서서히 익숙해질 거라는 믿음을 안고 제주 신고식을

요란하게 시작했다.


오후엔 아이들과 함께 전학 갈 학교를 미리 찾아갔다.
전입신고서를 제출하고 학교 건물을 돌아보며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지켜봤다.
선생님들은 따뜻했고,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여기, 좋아. 빨리 새 학교 가고 싶어”

학교외부를 둘러보고 아이들과 학교 앞 조그만 카페에서 음료 한 잔씩 손에 쥐고 방과 후 수업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는 농구를 하고 싶다 하고,
누구는 컴퓨터 수업을 기대한다 했다.
그 순간, 이곳에서의 시간이 단지 ‘적응기’가 아니라
‘시작의 시간’이 될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녁 무렵, 한창 치우고 닦고 정리하다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는 아이들을 보았다. 마당에서 씽씽 달리는 아이들 모습에 마음이 풀렸다. 내가 원했던 건 이런 풍경이었다. 자전거 타고 싶을 때 언제나 나가서

타고 동네 분위기를 마시며 자연에서 활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제주 입도 첫날부터 느낄 수 있었다.


20분 거리인 제주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겹살로 늦은 저녁을 채우고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길 위에 놓인 고요, 바람, 그리고
조금은 서툰 우리 가족의 첫 제주 밤.


하루 종일 불안의 조각들을 주워 담던 마음이
해 질 무렵, 마당 너머 붉게 번지는 노을 앞에서

조용히 녹아내렸다.
지글거리는 오겹살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
아이들 웃음 너머로 흘러가던 그 빛은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ㅡ
이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조용히 속삭여주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