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둘째 날의 기록
아침잠 없으신 엄마의 작은 뒤척임에
나는 새벽 다섯 시 반에 눈을 떴다.
방 안은 고요했지만 창밖은 이미 햇살로
물들고 있었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냄새
제주의 아침은 마치 천천히
나를 맞이하는 바람 같았다.
쨍한 햇빛이 마당 위로 포개지고
멀리서 들리는 이름 모를 새소리가
하루의 문을 열었다.
이곳에 오면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모닝 독서.
첫 아침부터 한 시간을 꽉 채워 책장을 넘겼다.
낯선 하루의 시작을 익숙한 문장으로 다독였다.
독서가 끝나자 엄마와 함께 어제 미처 다 하지
못한 2층 청소를 시작했다.
걸레질을 하며 이방 저 방을 돌아다니다 보니
아이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고단한 이사 다음 날의 아침이 그렇게 찾아왔다.
그리고 오늘도, 친정엄마의 손맛은 탁월했다.
간단한 재료로 차려낸 정갈한 집밥 한 상.
평소 입이 짧은 아이들도 한 그릇 뚝딱 비웠다.
오랜만에 엄마 밥을 먹는 나도 속이 꽉 찬 듯 포근했다.
엄마의 반찬은 그저 음식이 아니라
어제의 피로를 덜어주는 따뜻한 위로 같았다.
아침을 마친 후, 어제 청소하며
적어둔 물품들을 사기 위해
다이소 오픈 시간에 맞춰 출발했다.
이사를 민족 대이동이라 하더니
가전제품을 뺀 나머지는 모두 챙겨 왔지만
사소한 소유는 끝이 없었다.
소소하게 담다 보니 어느새 8만 원어치를 채웠다.
한참을 분주히 움직이다 보니
TV와 인터넷 설치 기사님이 도착했고
주인집도 들러서 이것저것 확인하느라
온종일 숨 돌릴 틈 없이 바빴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는 아이들.
10분 후, 아들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엄마, 자전거 타이어가 터졌어.”
이어지는 한마디ㅡ
“그리고… 넘어졌는데 머리를 돌에 박았어.”
심장이 철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들은 놀란 기색 없이 침착했다.
잠시 뒤 찢어진 손잡이와 멍든 다리까지
보여주며 자전거 모험을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늘 조심성 많던 아이였는데
새 동네에서 자전거를 맘껏 타게 되자
흥분이 앞섰던 모양이다.
아직 로드자전거는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빠는 아들의 도전을 응원하며
바로 자전거 매장으로 향했다.
나는 마음 한편이 철렁했지만
다친 몸보다 담담히 말하는 아들의 눈빛에
묘한 감동이 일었다.
“아, 울아들 더 단단해졌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이 저릿했다.
비상용 소독약을 꺼내 붉게 오른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뿌려주고는
다시 무덤덤하게 청소를 이어갔다.
입주 이틀째, 내가 선택한 삶의 결을
받아들이는 법을 조금씩 배우는 중이었다.
택배로 보낸 여름옷도 모두 도착했고
이틀 전 주문한 로켓배송도 무사히
제주집에 안착했다.
대형 마트는 차로 20분 거리.
배달도, 편의점도 없는 동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우리 가족에게
이곳은 여전히 낯설다.
해가 지면 벌레들의 세상.
모기와 전쟁을 치르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불편함 속에서도 나는 분명 많은 것을
배웠다.
아침에 읽었던 문장 하나가 마음에 남았다.
“어려운 길을 택하라. 시간이 지나면
루틴이 생기고 그 길도 익숙해진다.”
나는 늘 도시의 편안함에 기대 살았고
남의 루틴을 흉내 내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삶의 리듬을
스스로 만들어야 할 시간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식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깨달음이고 깨달음은 스스로 깨우치는 일이다. 누군가 나 대신 깨우쳐줄 수 없다."
나는 지금 그 문장을 몸으로 통과하고 있다.
편리한 도시에선 몰랐던 질문들이
불편한 이곳의 일상에서 날마다 솟구친다.
빨래를 말리는 바람의 방향,
벌레와 모기의 습격을 막기 위한 작은 지혜 하나까지.
누군가의 루틴을 흉내 내는 것으로는
이 새로운 삶의 길목을 온전히 건널 수 없다.
지혜는 책장이 아닌
살아낸 시간 속에서 천천히 스며든다.
누가 대신 깨우쳐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나는 오늘도 고요히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