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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집에서 시작된 익숙한 여행

제주살이의 첫 나들이

by Remi


제주살이, 그 시작은 낭만과 현실의 경계에서

출렁이는 파도 같았다. 짐을 풀기도 전부터

쌓여가는 먼지와의 사투, 낯선 구조의 집을 나답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이틀 동안 입주 청소에 온몸을 쏟아붓다 보니

정작 가장 애틋했던 사람을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내 곁에서 묵묵히, 그리고 쉼 없이 움직여준

친정엄마. 무거운 박스를 나르고 구석구석

닦아내며 흘리신 땀방울 위로는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덧칠되어 남았다.

그래서 오늘은 아무것도 미루지 않고 엄마를 위한 하루를 열기로 했다. 아침을 간단히 마친 뒤 주섬주섬 외출복을 챙겨 입고 제주 하늘 아래로 발을 내딛었다.
이 낯선 땅에서 우리 집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우리 차로 제주의 도로를 달린다는 사실이 아직은 어색하기만 했지만 그 어색함마저도 설렘으로 바뀌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의 첫 행선지는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코스였다.
바로 조천 고모네돔베국수. 올해 5월, 제주여행에서 무려 두 번이나 방문했을 만큼 그 맛에 반해버렸고 그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다음엔 꼭 같이 오자. 여긴 엄마도 좋아하실 거야.”
그 작은 바람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이야.
식당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으며 웃던 엄마의 얼굴을 보니 이미 이 하루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향한 두 번째 장소는 일출랜드.
제주 동쪽 끝에 위치한 이 정원은 반려견과 함께

산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우리 가족에겐 더없이 반가운 공간이다.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각양각색의 꽃들과

조우하게 되고 푸르른 나무들이 햇살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속삭이는 듯한 그 풍경은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치유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자연이 그린 정원 안에서 엄마는 한참을 걸었고
나는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사진 대신 마음에 담았다.
누군가의 손길보다 자연의 시간들이 훨씬 더 섬세하게 사람을 보듬는다는 걸 이곳에서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세 번째 목적지는 우리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표선해수욕장. 맑고 투명한 물빛이 인상적인

이 해변은 제주 바다의 순수를 닮아 있다.


아쉽게도 수영복은 아직 이삿짐 속에서

도착하지 않아 아이들과 “발만 담그자”고

약속했지만 그 차가운 물결 위로 퍼지는

웃음소리와 파도 위를 달리는 작은 발자국들은
이미 충분히 여름이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다는 잔잔했다.
마치 제주가 조용히 말하는 듯했다.
“어서 와, 여긴 너희의 새 삶이 시작될 자리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이전 여행에서

폭우에 가려 아쉬움만 남았던 보롬왓.

이곳은 '바람의 밭'이라는 뜻처럼 오늘의 제주

바람은 유독 다정했다. 들판 위로 엄마와 나는

나란히 서서 아무 말 없이 아이들 노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꽃들의 향은 바람을 타고 코끝에 안기고
하늘과 맞닿은 평야는 마치 마음의 탁 트인

창 같았다. 엄마는 오늘 들른 곳 중에서 이곳이

가장 신선하고 인상 깊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왠지 모르게 뿌듯했고 보롬왓이라는 이름의 여운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짧다면 짧은 네 시간의 여정.
그 안에 웃음과 휴식, 추억과 감사가 촘촘히 수놓아졌다.

집으로 돌아와 각자의 시간을 보내던 오후,
아이들은 거실 창가에서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앉아 있었고 엄마는 냉장고 문을 열며 “김치가 없네”라고 혼잣말을 하시더니 곧 부엌으로 가 조용히

김치 담그는 일을 시작하셨다.

그 모습에 다시금 마음이 저려왔다.
언제나 그렇듯, 엄마는 없는 것을 채우고

불편한 것을 알아채는 사람이다.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사랑.
나는 미안했고 동시에 너무도 고마웠다.

그렇게 제주살이의 두 번째 날이 저물어갔다.
새로운 공간 낯선 리듬 속에서도 사람을 중심에

두고 따뜻한 국수 한 그릇과 햇살 한 줌으로 채워진 하루. 아마도 오늘 같은 날들이 하나씩 쌓여

이곳이 진짜 우리의 집이 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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