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설렘과 나눔의 기적
오늘은 아이들의 전학 첫날이었다.
낯선 교정, 처음 마주할 담임 선생님,
아직 이름도 기억 못 할 친구들 사이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내가 더 긴장되어 평소보다 한 시간은 이르게 잠에서 깼다.
아침 햇살은 유난히 고요했고
바람결조차 말간 하루의 시작이었다.
서둘러 아침을 차리고 분주히 아이들의
머리를 매만지며 옷매무새를 챙겼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여느 날처럼 해맑게 웃으며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학교로 향하던 차 안에서 둘째가 문득 말했다.
“엄마… 나 조금 떨려.”
그제야 나도 아이도 이 하루가 얼마나
특별한 날인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첫날이라 함께 교무실에 들러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아이들 반을 배정받은 뒤 방과 후 수업
신청과 스쿨버스 안내까지 모두 마치고 나서야
나는 교정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제주에서 처음
마주한 선생님들의 첫인상은 기대 이상이었다.
따뜻했고, 밝았고, 진심 어린 환대로 아이들을
맞아주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학교를 나서며 깊은숨을 들이켰다.
이제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부족한 식료품을 사러 나섰다.
이미 이사 후 대형마트만 세 번째 방문이었지만
막상 도착해 보면 없으면 불안한 것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이곳은 번화가와 거리가 멀고 배달 서비스도
닿지 않는 마을이라 냉장고 속이 채워져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또다시 10만 원이 훌쩍
넘는 장바구니를 채우고 나서야 마트를 나섰다.
그리고 오늘의 두 번째 미션.
울 반려견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도록 마당을 정비하기 위해 생애 처음 철물점이라는 곳을 찾았다.
그곳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도시에선 접해본 적 없던 물건들로 가득 찬
필요할 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의 보물창고.
망치 하나, 울타리용 그물망 하나에도 주인의
손때가 묻은 듯 따뜻한 정이 느껴졌다.
사다 보니 또 10만 원이 넘었지만 모두 실용적인 것들이라 허투루 지출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에게 꼭 필요한 도구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함께 점심을 먹고
따끈한 커피 한 잔 내려놓은 채 중고마켓을
습관처럼 둘러보던 중 눈에 띄는 게시물 하나가 올라왔다.
단 10분 전, 수많은 원목가구를 무료로 나눔 한다는 글이었다. 스크롤을 내리며 깜짝 놀랐다. 우리가
며칠간 살까 말까 고민했던 가구들이 눈앞에 있었다.
“이건 운명이야.”
주저할 틈도 없이 메시지를 보냈고
“먼저 오는 분께 드리겠습니다”라는 답변에
단숨에 차 키를 들었다.
20분 만에 도착한 그 집은 젊은 부부가
새 보금자리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 안 가득, 잘 닦인 원목가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풍경 자체가 하나의 다정한 이별 같았다.
내차 SUV 한 대에 실어 나르기엔 부족해 두 번 왕복했다. 첫 번째 짐을 실을 땐 남편분이 직접 도와주셨고 그 따뜻한 손길에 나도 작지만 정성
담긴 커피쿠폰을 전했다.
나는 ‘공짜’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
정성스럽게 나눈 것에는 감사가 담겨야 한다고
늘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엔 엄마와 함께 받은 가구들을
여러 번 닦고 방 안 곳곳 가구 번지수를 찾아주었다.
모서리에 덧대어진 나무의 결, 손때 묻은 서랍의
손잡이 하나하나가 이 집의 공기와 천천히 어울려갔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낯설기만 했던 이곳이
서서히 우리 가족의 온도를 닮아가는 게 느껴졌다.
입도한 지 5일째, 비로소 우리 집이 완성된 날이었다.
오후 4시. 방과 후 수업까지 마친 아이들을
학교 앞에서 데려오는 길. 차 문이 열리자마자
아이들이 쏟아내는 목소리에 활기찬 차 안이었다.
“엄마! 오늘 친구 두 명이랑 벌써 친해졌어!”
“우리 담임선생님 진짜 착해!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 아이들의
하루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밝은 웃음에 나도 긴장이 풀렸다.
"잘 해냈구나."
그 한마디를 마음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누군가는 단순한 하루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삶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조금 특별한
하루였다.
설레고, 분주하고, 또 감사한 하루.
그리고 이 모든 순간들이 모여
우리가 제주에서 살아갈 진짜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