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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로 살기 위해

내 안에 잠든 나를 깨우는 시간-입도 5일 차

by Remi

입주 청소가 끝났다. 이제야 비로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여정은

결코 나 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예상하셨는지 친정엄마는 매일

하던 일을 멈추고 입주 이사 도우러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탑승했다. 이렇게 수십 년을

내 그림자처럼 곁에서 나를 감싸온 친정엄마의

손길 없이는 애초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혼자 큰소리치며 아이들 손을 꼭 붙잡고
제주로 내려온다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닥치면 다 하겠지 하던 마음은

엄마가 계셔서일까?
며칠 만에 깊게 가라앉았다.


옵션이 갖춰진 제주 연세집이라지만
삶을 통째로 옮기다시피 한 이사는
마치 내 모든 시간을 집 안 가득 흩뿌리는

작업 같았다.


정리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몇 달간 비워진 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먼지와 고장과 손이 닿아야 할 자리를 드러냈다.


쓸고, 닦고, 털고, 이음새가 헐거워진 것들을

단단히 조이고 냉장고와 보일러, 세탁기와 TV의

고장을 체크하고 A/S를 부르고 건물주의 연락처를

수없이 눌러 도움을 청하며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렸던 지난 5일!


그런데, 이토록 고단한 하루하루를 지나고서도

나는 지금 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낀다.


예전이라면 하루만 그렇게 움직여도 이틀은

쉬어야 했을 텐데 제주에서는 피로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자연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았다.


아침이면 알람 소리가 아닌 처마 밑을 스치는

바람과 지붕 위를 누비는 새들의 노래에 새벽

5시면 눈을 뜬다.


햇살을 머금은 마당은 초록의 물결로 부서지고

아침 7시에 아이들과 둘러앉아 따뜻한 아침을

먹는 시간은 어떤 고급 레스토랑의 식탁보다 빛났다.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하다 문득 고개를 들면
살랑이는 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창밖 나무의 잎사귀들이 서로를 쓰다듬듯 흔들린다.

그저 그런 일상이 기적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다.



제주에 와서 다시 시작한 모닝 독서는 내게 다시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쌓인 짐들을 정리하며

미뤄둔 책을 다시 펴 들었고 오늘은 어제보다 더

깊게 문장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야 나는 글을 쓰는 일이 내 안의 고요와

마주하는 방법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도시에선 늘 누군가의 말에, 요청에, 기대로

반응하느라 바빴다. 늘 잘 대답하는 삶을 살아왔고

그 삶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언제 가장 행복하고 무엇에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인지 모르고 살았는데 마흔을 넘긴 지금에서야 비로소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인가?"
"나는 진짜 나로 살고 있는가?"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세상이 말하는 정답들에

이끌려 다니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내 안에 잠든 또 다른 나

찾고 싶어 이곳 제주로 왔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언가를 새롭게 얻는 일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마주하는 일이다.


어쩌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자신만의 빛나는

조각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잃어버린 줄만 알았다.
그저 사라진 줄로만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조각은 바쁜 일상 속에

조용히 묻혀 있었을 뿐이다. 내가 외면하고

지나쳤을 뿐 단 한 번도 나를 떠난 적 없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다짐해 본다.

내 안에 숨겨두었던 진짜 나 조심스럽게,

그러나 다정하게 한 겹씩 꺼내어 마주할 것이다.

흙먼지를 털어내듯 시간에 묻힌 나를 닦아내듯

그렇게 정성껏 그리고 용기를 다해
나를 다시 꺼내어 빛이 닿는 자리로 데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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