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도 6일 차ㅡ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는 손길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학교에
향했고 나는 조용히 세탁기 한 번을 돌린 뒤
엄마와 함께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오후 2시
비행기를 타고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기로
했다.
이른 시간, 우리의 행선지는 제주 민속 오일시장.
제주여행을 수차례 다녔지만 늘 일정이 맞지 않아
매달 2일, 7일에만 열린다는 이 장날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어쩌면 오늘 이 외출은
제주살이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시장 구경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엄마와 나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도 한껏 들뜬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오전 10시, 늦은 도착
탓에 옥내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폭염 뚫고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그런 불편조차도 오늘만큼은 감탄으로 덮여버렸다.
오일장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화사하게 웃고 있는 꽃집의 모종들이었다.
우리가 제주살이를 시작하며 가장 하고 싶었던 일,
바로 작은 텃밭을 가꾸는 것이었기에
그 풍경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한동안 발길을 멈춘
채 마치 아이처럼 모종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마음을 부풀렸다. 나보다 엄마가 더 신나 보였던 건
기분 탓일까? 엄마가 토마토 2개, 오이 2개, 가지,
고추까지ᆢ
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풍경은 더더욱 다채로워졌다.
갓 딴 채소들이 수북이 쌓인 좌판,
해풍 머금은 건어물, 오랜 세월을 지켜온 듯한 할머니들의 손길…
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이 즐비한 그 속에서 우리는 텃밭 가꿀 때 꼭 필요하다는 모자와 토시, 아이들이 필요한 양말과 하우스귤까지 빠짐없이 담아냈다.
그러던 중 엄마가 문득 말씀하셨다.
“지금이 딱 매실 담글 시기다.”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10kg짜리 매실
한 상자와 담금용 소쿠리까지 덜컥 구입해 버렸다.
사실 나는 매실청을 담그는 일은 텔레비전 속
장면처럼 어디 먼 이야기라 여겨왔기에 오늘이 내
인생 첫 매실 담그는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을 시장 안에 머물며 구경과 쇼핑을 마친 후
배가 출출해진 우리는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국숫집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엄마와 마주 앉아
따끈한 국수를 한 젓가락씩 나누며 조용히 마지막 식사를 했다. 엄마의 마지막 제주 한 끼라는 생각에
국수 한 그릇도 유독 깊은 맛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공항에 엄마를 모셔다 드리는 길은 유독 조용했다.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서로 다른 도시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마음 한쪽을 조용히 흔들었다.
헤어짐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번 이별엔 서로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잘 숙성된 장독처럼 진득하게 남았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마트에 잠시 들러 매실청에
넣을 설탕과 몇 가지 소소한 생필품을 챙겼다.
엄마가 남기고 간 빈자리는 금세 일상의 움직임으로 채워졌다.
제주의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고
그 속을 뚫고 집에 도착하니 아이들의 하교
시간이었다.
전학 후 등교 3일 차.
아이들은 제주학교 교실이 더 익숙해진 듯했고
친구들과의 거리도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지는 게
눈에 보였다.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재잘거리는 모습에
‘이곳에 와도 괜찮겠구나’ 싶은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오후 햇살이 길게 드리우는 시간,
우리는 매실 담그기라는 특별한 미션을 함께 수행하기로 했다.
텃밭용 소쿠리와 담금용 통, 그리고 아침 시장에서
들고 온 신선한 매실까지 하나하나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매실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과일이었다.
엄마에게 배운 대로 물에 오래 담그지 않고
살살 흔들어가며 흙을 털고, 맑은 물로 재빨리 세척했다. 그리고 매실 하나하나에 붙은 꼭지를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제거하는 아이들.
그 모습이 어찌나 기특하고 사랑스럽던지
순간순간이 고스란히 마음속에 저장되는 것 같았다.
“매실은 물기를 남기면 안 돼.
꼭 잘 말려야 나중에 곰팡이 안 피고 맛있게 익는단다.”
내 설명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깨끗하게 씻은 매실을 수건 위에 가지런히 펼쳐놓았다.
하루 종일 웃고 떠든 에너지가
이제는 뿌듯함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저녁 무렵.
외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며
아이들은 서로 먼저 자기가 했다고 떠들썩하게 자랑했다.
"엄마 없이도 우리 다 했어요.
“제주에서의 이별과 시작, 매실청처럼 천천히
익어가는 하루”!" 그 소리에 엄마는 피식 웃으셨고
나도 모르게 눈가가 따뜻해졌다.
이 작은 부엌에서 우리는 함께 손을 모아
계절을 담갔다. 생애 첫 매실청 담그는 날,
엄마의 손길은 떠났지만 그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이 제주살이에서 가장 오래 기억될 순간이라는 것을.
삶은 이렇듯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채워진다.
거창한 일 하나 없어도 엄마와 함께 걸은 시장길,
내 손으로 처음 고른 싱그러운 매실,
여름 햇살 아래 마주 앉아 나눈 국수 한 그릇.
그 모든 것이 오늘 하루를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오후,
이제는 제법 제주 생활에 익숙해진 아이들과 함께
그 매실을 정성껏 다듬어 통에 담갔다.
깨끗이 씻고 조심스레 꼭지를 따고,
마지막 남은 물기까지 손수 닦아내는 아이들의 손끝에
나는 오래전 엄마가 내게 보여주던 손길을 보았다.
“엄마, 우리 이거 진짜 잘한 거 맞지?”
영상통화 속 외할머니께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얼굴은 햇살처럼 반짝였고
나는 그 작은 성취감 위로 흐르는 평온함에 조용히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