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7일 차-우리의 제주살이 두 번째 바다
6월 말부터 전국이 이른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제주도라고 다를 건 없다.
한낮 햇살은 이글거렸고 숨을 들이마셔도
목이 바짝 마를 듯한 날씨였다.
오늘은 원래 집 근처 효리네 민박이 있던
카페로 산책을 나설 계획이었지만 이 무더위에
아이들 땀이 줄줄 흐를 게 뻔했고 코코는 아마
더위에 헐떡일게 뻔했다. 결국 고민 끝에
하교한 아이들에게 바다 갈까 말 끝나기도 전에
둘 다 흥분하면서 소리쳤다.
에어컨 대신 바람이 부는 바다,
텁텁한 공기 대신 짠내 가득한 파도 소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원한 바람 한 줌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제주공항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이호테우해수욕장. 방파제 양끝에 서 있는 빨간 말,
하얀 말 등대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이 해변을 감싸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이호테우해변은 여러 번
갔지만 해수욕장에서 즐기는 건 처음이었다.
이호테우의 매력은 검은빛을 띠는 자갈 섞인 모래사장이다. 일반적인 백사장과 달리
발끝으로 전해지는 감촉이 다르고 검은 모래 위로
황금빛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며 묘한 분위기를 만든다.
무엇보다 수심이 깊지 않고 파도도 잔잔해서
아이들 물놀이 장소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
유명 관광지 같으면서도 어딘가 우리 동네
앞바다처럼 정겹고 느슨한 공간.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는 도민처럼 보이는 분이
이어폰을 끼고 피크닉매트에 누워 일광욕을 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우리도 점점 제주에
스며들고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늘 그렇듯 발만 담그자며
허술한 계획으로 도착했지만
아이들은 이미 해맑게 바다에 몸을 담갔다.
바다는 언제나 계획을 무너뜨리는 쪽이다.
그리고 우린 기꺼이 그 무너짐을 받아들인다.
아이들이 바다에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 옆에는 반려견 코코가 귀엽게
앉아 있었다.
나는 파라솔 대신 우산 그늘 아래 앉아
파란 수면 위를 유영하는 아이들의 웃음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느새 햇살은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고
아이들의 웃음은 파도보다 더 크게 부서졌다.
이따금 물살에 휩쓸려 밀려오는 튜브,
모래를 헤집으며 쫓아다니는 발자국들
그리고 서로를 향한 물세례. 그 순간순간들이
모두 이 여름을 찬란하게 수놓는 장면이 되었다.
이호테우해수욕장은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부담이 없고 조금만 파고들어 가면 바닷속
물고기 떼도 쉽게 만날 수 있어 물놀이를 시작한 아이들에게도 안성맞춤인 바다다.
무엇보다 수심이 깊지 않고 파도가 잔잔해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날이 좋은 날엔
서핑과 튜브, 바다수영이 어우러지고
야자수 그늘 아래 캠핑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바람과 물빛, 모래와 풍경은
결코 도심 같지 않은 곳.
그림처럼 선명한, 그러나 감정은 흐릿하게 스며드는 그런 해변. 그게 바로 이호테우해수욕장이다.
바다에 몸을 담근 아이들은
파도 하나에도 까르르 웃었고
검은 모래를 손에 쥐고선
무언가를 조물조물 만들기도 했다.
나는 그저 그 곁에 앉아 있었다.
해변의 바람 속에서,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서,
이 새로운 일상에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제주살이라고 해서
늘 거창한 일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이런 하루, 아이들과 더위를 피해 바다로
향하는 일상조차 조금 특별해진다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파도가 말등대를 가볍게 스치며 넘실거릴 때,
아이들이 내 옆에 기대어 웃고 있을 때,
나는 아주 조용히 깨닫는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제주에 온 이유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