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도 8일 차 - 조용한 바람이 흐르는 동네
책방을 가려고 했던 오늘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 한 통에
수화기 너머로 쏟아내는 근황들,
그리고 그 끝을 닮은 긴 메시지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외출 채비를 서두르던 그때,
나를 빤히 바라보는 코코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책방 대신 코코와 함께
차로 10분 거리 소길별하로 향했다.
이효리가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이 동네에서 마주칠 수 있었을까.
아이들 등굣길이 끝나고 집안일을 할 때면
배경처럼 틀어두는 효리네 민박.
그 여운을 따라
나는 오늘 이 작은 공간을 찾아왔다.
소길별하는 제주 소길리에 자리한
작고 조용한 로컬 브랜드 소품샵이다.
이효리·이상순 부부가 살던 집이기도 했고
지금은 그 공간의 감성을 담아
제주의 고유함을 전하는 라이프스타일 숍으로 운영되고 있다.
도내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의 물건,
자연에서 온 제주다운 제품들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제주
여행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소길별하의 마당은 누가 일부러 정돈하지
않은 듯 그러나 어느 구석 하나 소홀함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정원이었다.
짧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적당히 햇볕이 드는 데크 위에
여유롭게 놓인 의자 몇 개,
그늘을 만들어주는 커다란 나무,
햇살에 반짝이는 감귤잎과 수국꽃이 반겨준다.
효리네 민박을 봤다면 분명 익숙한 장소일 거다.
마당을 천천히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
바람은 조용하고 새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반려견 동반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반가웠다.
실내에는 품에 안거나 케이지에 넣는 조건으로
입장할 수 있어서 코코를 케이지에 조심스레 넣고
나는 천천히 걸으며 구경했다.
소길별하 실내로 들어서자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나무 창틀 너머로 보이는 푸른 숲이었다.
마치 액자 속 풍경처럼 고요하고 단정한 초록.
그 창 앞에 놓인 책 한 권, 작은 꽃병, 그리고 조용히 놓인 돌 몇 개. 누군가의 하루가 조용히 눌러앉아
있는 풍경 같았다.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물건이 아니라 숨.
제주의 공기, 계절, 바람이 물건 위에 가볍게
내려앉아 있었다. 진열된 제품들마저 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는 듯했다. 이곳에선
무엇을 살까 보다 어떤 감정이 머무는가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2층에는 제주를 담은 책과 지도,
손바닥만 한 엽서들과 정성스레 꾸려진
굿즈들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것들이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를 들춰보다 보면
이 공간이 단지 상점이 아니라
제주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름의 전시처럼
느껴졌다.
코코는 내 품에 안겨서 조용히 숨을 쉬었고
나는 그 따뜻한 무게를 느끼며
잠시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이곳은 물건을 사러 오는 곳이 아니라
기억될 하루를 들르러 오는 곳이라는 걸.
햇살이 쏟아지던 마당,
적당히 그늘진 나무 아래
혼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마당엔 풀냄새와 함께 소길의 바람이 불어오고
코코는 내 무릎 위에서 졸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멀리 떠나지 않아도 충분히 낯설고 또 편안한 하루.
제주에 살며 가장 좋은 점을 꼽자면
이런 여유로움 아닐까.
소길리의 느린 공기와 푸른 정원 속에서
나는 살아가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하루의 끝에 남은 건 한 잔의 커피가 아니라
마음에 천천히 스며든 평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