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도 9일 차
제주살이 두 번째 주말.
주말이라고 해서 게으름을 피울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도 제주에서는 새벽
여섯 시만 되면 몸이 먼저 아침을 깨운다.
이게 바로 자연 시계의 위엄일까.
덩달아 아이들도 하나둘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마당에서 농구공을 튕기고 배드민턴 라켓을
휘두르며 땀이 나기 전까지의 시원한 아침 시간을 알차게 태워버린다. 그 모습이 나까지 괜히 오늘
하루를 성실히 살아야 할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오전이 지나자마자
폭염이 본색을 드러낸다.
바깥 활동은 사치라고 생각해
우리는 피서를 택하기로 했다.
해수욕장이 아닌, 애월도서관으로.
제주에서는 도서관조차도 바다를 품는다.
애월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한 이 도서관은
책 읽는 틈마다 창밖으로 푸른 물결이 스민다.
도서관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여긴 책 보다 풍경에 더 빠질지도 모르겠다.
오늘 알게 된 사실 하나.
전국 어디서든 이용 가능한 책이음 도서관카드는
제주에서도 문제없이 통했다.
육지에선 아이들 각각 도서관 카드가 있어
한 명당 10권씩 대출 가능했기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고
아이들 책, 내 책까지 스무 권 가까이 담았건만
"인당 5권까지만 가능합니다."
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안내.
게다가 아이들 회원카드를 만들기 위해선
휴대폰 인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무리 제주살이 중이라지만
나랑 외출할 때 굳이 휴대폰을 챙기지 않아
오늘은 일단 다섯 권만 아쉽게 빌리고
평일에 다시 오기로 마음을 접었다.
책 구경도 했겠다, 슬슬 허기가 밀려온다.
아이들이 갑자기 "햄버거가 너무 먹고 싶다"며
혼신을 다해 어필하기에
몇 달 만에 찾은 맥도널드.
그런데 여기 뷰도, 또 바다다.
이쯤 되면 바다도 우릴 따라다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주는 길을 걷는 곳마다
수평선이 깔려 있다. 1인 1세트씩 시켜
말없이 야무지게 흡입하고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휙 일어나 나온 우리.
돌아오는 길엔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고 휴지며 필요한 생필품도 한가득.
참으로 평범하지만 나름 알찬 주말 루틴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니 엄마가 보낸 택배 박스 네 개가
단정히 문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이제 남은 오후는 그 박스들 속 물건들을
정리하며 마무리하게 될 테지.
바다와 도서관과 햄버거,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여기서의 주말은 더 이상 특별함이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살아간다.
아이들이 집에 와서 예쁜 미소를 장착하고는
"오늘 너무 행복한 하루였어."라고 했다.
그 짧은 말 한마디에 오늘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아~ 이렇게 평범한 하루가
이토록 근사한 선물이 될 수도 있구나 싶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작은 입술에서
가장 따뜻하게 도착하는구나 싶었다.
소란하지 않아 더 단단해진 오늘 하루.
제주의 시간은 그렇게 내 삶에 매일
겹겹이 스며드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