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도 10일 차, 바람 따라 물빛 따라
제주살이를 시작한 지 어느덧 몇 주.
우리가 이 섬에 머문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주라는 땅이 내게 조금씩 말을 걸어온다.
처음엔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던 이 풍경들이
이제는 나의 하루 속에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제주 이주 후
세 번째로 찾은 해수욕장.
표선, 이호테우에 이어
드디어 협재해변으로 향했다.
여행객으로 왔을 땐 수없이 다녀간 곳이지만
이제는 이 집에서, 이 일상 속에서
마치 소풍 가듯 가볍게 다녀올 수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몽글해졌다.
주말 아침 6시 반.
도시였다면 늦잠이 당연한 시간이건만
아이들은 제주의 햇살에 눈을 뜨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는
빨래를 널어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밥상도, 뒷정리도 자연스레 아이들의 몫이 되었다.
제주로 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변화다.
반복되는 학원과 숙제 속에
늘 피곤에 지쳐있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일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이 과정이
무척 고맙고 벅차도록 기쁘다.
집에서 30분 거리,
마치 동네 앞 놀이터처럼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바다라니.
이것이 바로 제주살이의 특권 아닐까.
협재해수욕장은 참 신비로운 곳이다.
햇살이 쏟아질 땐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고
구름이 몰려오면 짙은 청록의 깊이로 바뀐다.
하늘빛과 바람, 햇살의 기분에 따라
바다는 하루에도 수차례 다른 얼굴을 내민다.
그 변화가 늘 새롭고, 그래서 늘 설렌다.
수심이 얕고 파도가 잔잔한 협재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였고
보호자인 내게도 마음 편한 쉼표였다.
오늘따라 파도는 출렁출렁,
워터파크 파도풀처럼 아이들을 흔들어주었고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물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 또한 파라솔 아래
반려견 코코와 함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한낮의 평화를 누렸다.
세 시간가량 놀다 보니
아이들은 스스로 “슬슬 집에 가자”며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이제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면
스스로 물놀이를 마무리하고
바다에서의 시간을 고이 접을 줄 안다.
이 작은 자립과 변화가
나는 괜히 뭉클하다.
제주는 우리 가족에게
시간의 질을 새롭게 가르쳐주는 땅이다.
도시의 시간은 늘 무언가에 쫓기듯 흘렀다면
이곳의 시간은 목적 없이도 깊고 충만하다.
주말마다 ‘어디를 가야 하지?’ 고민하지 않아도
집 앞바다에서, 들판에서,
하루하루가 충분히 풍요롭고 만족스럽다.
오늘처럼, 바다와 가까운 일상을 산다는 것.
늘 바람이 있고, 그 바람에 실려 오는
소금기 가득한 삶의 기운 속에 있다는 것.
그 안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나도 함께 단단해져 간다는 것.
지금 우리는 떠밀려 사는 삶이 아닌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삶은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분명히 충만하고 무엇보다
우리답다고 말할 수 있다.
역시, 제주는 바다이고
그 바다 곁에서 사는 우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