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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낯선 땅에서 만난 정겨움

입도 11일 차 - 제주에서 배운 이웃의 온기

by Remi

제주에 오기 전,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집이 하나 있었다.
햇살이 고요히 내려앉던 창가,
푸르른 숨을 쉬는 넓은 마당,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집의 주인 부부는
참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딱 맨발의 한 걸음 차이였다.
내가 찾아가기 직전, 먼저 집구경 하던
분이 계약금을 바로 내더니 그 집과 인연을 맺었다.
아쉽고 허탈했지만 그저 거기까지의 인연이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아저씨가 먼저 연락이 오셨다.
“혹시 아직 집을 못 구하셨으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우리랑 인연은 못되었지만 우리 딸들과 나이가

비슷해 자꾸 마음이 가네요.”
이미 다른 곳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분은 마치 오래된 이웃처럼
직접 집까지 찾아와 주셨다. 알고 보니 아저씨가

살고 계신 집은 우리 집과 걸어서 5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머물고 계셨다. 한 번은 사모님과 함께 들리기도

하셨고 어제는 아저씨네 앞집에 사는 꼬맹이와

함께 들리기도 하셨다. 그 꼬맹이는 우리 애들과

같은 학교 동생이었고 형을 참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였다.

낯선 땅에서 이런 온기는 생각보다 깊은

위로였다. 그분은 나에게 제 주택살이의

현실과 집 관리방법,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
이 섬의 사람들에 깃든 정서를
참 진심으로 성의껏 알려주셨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장점,
이 동네의 정취까지.


밤늦게라도 괜찮으니 힘들 땐,

도움 필요할 때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까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방인에게는 큰 용기였다.
비록 집주인과는 아직 서먹한 관계지만
아저씨는 마치 아버지처럼 따뜻했고
그래서 오히려 더 마음이 갔다.




아이들은 전학 온 지 두 번째 월요일을 맞았다.
오늘은 여름방학 방과 후 수업 신청일.
제주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수업 신청이라
아이들도, 나도 괜히 잔뜩 긴장했다.
읍면 지역 초등학교의 모든 방과 후 수업이
무료로 운영되는 덕에 경쟁도 치열할 거라 생각해
정각에 맞춰 알람을 몇 개나 맞춰두고 대기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원하는 과목은 모두 신청에 성공했다.
오랜만에 느껴본 속이 다 시원한 뿌듯함.

하교 후엔 아이들에게 감자팩을 해주었다.
어제 협재 바다에서 한껏 불탄 얼굴이
마치 동남아 휴양지에서 막 돌아온 듯했다.
선크림도 소용없을 만큼 강한 햇빛에
따갑다고 말하는 아이들 피부 위에
감자를 얇게 저며 얼굴과 어깨에 하나씩 올려주었다.

제주에 있는 동안,
감자팩은 내 일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이렇게 소소하지만 따스한 제주살이의

하루가 조용히, 그러나 깊게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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