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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가운데, 새별오름에 서다

입도 12일 차 - 제주여름의 기억

by Remi

제주의 초록은,
햇살을 머금고 더 짙어진다.
새별오름을 오르던 오늘,

햇살은 정수리 위에서 은근히 눌러왔고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조차 미지근한 오후였다.


아이들 둘 다 6교시 있는 날이라 하교시간에

맞춰 코코와 함께 아이들 학교에 데리러 갔다.

오기 전 아이스크림 하나씩 꼭 가지고 오라는

둘 부탁에 집에서 빵바레 두 개 챙겨 차에서

나눠줬더니 세상 꿀맛이라고 한다.





집에서 15분 거리인 애월읍 봉성리에 위치한 새별오름은 해발 519m, 높이 약 119m의

오름으로 초보자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를 자랑한다.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약 20분 내외.
초등학생도 천천히 오를 수 있는 편안한 산책길이다.
길 위에는 친절하게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바닥에는 흙길 위로 마른풀과 매트가 덮여 있어
걷는 감촉마저 부드럽다.


새별오름에 도착해 아이들은 앞서거나 뒤처지거나
가끔은 길가에 핀 풀꽃을 보느라 멈추기도 하고
조금은 느릿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코코 덕분에
걷는 길마다 웃음이 따라왔다.


오름의 중턱쯤에서 아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보았다. 햇볕에 달궈진 땀방울 하나가 턱 끝에서 반짝이며 떨어졌다. 저 땀방울이 말해주는 것은

단순한 더위나 피로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지금 세상의 가장 맑은 공기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절을 겪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여름의 한복판에 함께 서 있다는 것.



나중에 집에 와서 발견한 사진인데,

딸아이가 새별오름을 오르며 조용히 남긴 한 컷,
아마도 아무 말 없이,
“나 여기까지 왔어” 하고 스스로에게 기록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날의 땀, 그날의 바람, 그날의 발걸음.
그 모든 걸 담아낸 딸아이의 깜짝 셀프기록.



정상에 오르자 눈앞에는 제주의 서쪽 들판과

오름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엔 멀리 한라산의 능선까지 보인다.

구름이 커다란 손바닥처럼 하늘을 덮고

그 아래서 우리는 손을 흔들며

오늘의 순간을 기억 속에 눌러 담았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숨이 멎을 만큼 탁 트여 있었다.
들판은 초록으로 넘실거렸고
하늘엔 두둥실 솜구름이 떠 있었다.
나는 코코를 품에 안고,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어 보였다.
“여기까지 왔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고 단단한 선언이었다


내려오는 길 꼬불꼬불 이어진 오솔길 끝이

마치 시간의 꼬리 같았다.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여름이

그 길 위에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새별오름은 그리 크지도, 유명세를 타지도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장소다.

잠시 머물다 가기에 좋고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기에 더없이 적당하며
아이와 함께 걷기에 딱 알맞은 속도의 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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