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작고 조용한 우주, 굿나잇잡화점
“사는 건 결국, 취향의 세계를 꾸리는 일이다.”
– 이슬아, 『버찌는 버찌대로 익어간다』
“사소한 물건 하나가 하루를 바꾸기도 한다.
그건 물건이 아니라 위로니까.”
– 이다혜, 『어느 날, 마음이 불행하다고 말했다』
이 문장들이 마음 한 켠에 조용히 내려앉은 날
나는 우연히 제주 골목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나의 취향을 깨우는 공간을 만났다.
그곳의 이름은 '굿나잇잡화점'
제주에 내려온 이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고 있다. 좋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 안에 나라는 사람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취향도, 여유도, 사소한 즐거움도
무의식적으로 유예된 채로 살아가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돌아오던 길,
햇볕이 내리쬐는 골목 모퉁이에
‘잡화점’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간판이었지만
내 안의 감각이 찰칵하고 켜지는 느낌이었다.
바로 차를 세우고 아이들과 함께 문을 열었다.
가게 이름은 굿나잇잡화점.
좁고 조용한 실내는 마치 오래된 감정을
정성껏 정리해 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한쪽 벽면엔 작은 그릇들과 아기자기한 오브제,
레트로한 조명이 낮은 천장을 따뜻하게 물들이고 있었고 구석구석 숨겨진 소품들은 마치 어릴 적의
나를 조용히 불러내는 것만 같았다.
넉넉하진 않지만 오밀조밀하게 채워진
책과 소품, 레이스와 조명, 그릇과 귀여운 인형들.
바람 한 점 없는 정적인 공간이었지만
내 마음엔 바람처럼 감탄이 불어 들었다.
아기자기한 소품샵을 좋아하는 내가
이렇게 오랜만에 설렘을 느낄 줄은 몰랐다.
그러던 중, 우리의 시선을 붙든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책장 한 켠이었다.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책을 바라보던 그 순간
사장님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다 읽은 책이에요.
깨끗해서 그냥 버리긴 아깝고요.
좋은 분에게 가면 좋겠다 싶어서요.
무료에서 한 권에 5천 원에 드려요.”
그 말에 나는 숨죽여 기뻤다.
도서관에서는 늘 대출이 밀려 있는 책들,
언젠가 소장하고 싶던 리스트에 있던 책들이
지금 눈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책은 권당 천 원이라는 말에
아이도 나도 열심히 고르고 또 골랐다.
책을 고르는 동안
나는 오랜만에 완전히 나였다.
엄마도 아니고 그저 취향이 있는 한 사람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확실히 내 세계를
다시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곳에서의 모든
감정은 어제의 피로도, 오늘의 복잡함도
잠시 내려놓게 만들었다.
작은 잡화점 하나가
이토록 마음을 채울 수 있다니.
지금 이 순간을, ‘굿나잇’이라 말하고 싶다.
아늑하고 반짝이는 하루의 마무리로.
책을 안고 가게를 나서는데
마당 한편에서 하얀 백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아이들이 “안녕~” 하고 웃자
백구도 조용히 눈을 가늘게 뜨며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마저 이 잡화점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날의 나는 소품 하나와 책 몇 권으로
작고도 단단한 위로를 받았다.
그건 단지 물건이 아니라
오랫동안 묵혀 있던 취향의 언어들이었고
나를 다시 나답게 해주는 감각의 회복이었다.
굿나잇잡화점.
이름처럼 따뜻한 인사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만든 그 공간은 제주살이 속 나의 여름을 한층
더 깊고 조용하게 빛나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