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초콜릿과 바람사이
아무런 일정도 없는 평일 밤
아이들이 나지막이 꺼낸 한마디.
“내일은 뭐 체험 같은 거 하면 좋겠다.”
그 말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신호였고
나는 기꺼이 그 마음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하교 시간, 따가운 햇볕을 조금 지나
우리는 서귀포에 있는 체험공간 초콜릿랜드로
향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도 적고
공간 전체에 마치 우리 가족만이 머물러 있는 듯한
조용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두 가지 색의 초콜릿을 짜
넣으며 서툴지만 집중력 있는 손놀림을 보여줬다.
첫째는 다크초콜릿을, 둘째는 화이트초콜릿을
들고 서로 교차로 짜가며 초콜릿 틀을 채워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아주 작은 협업의 세계를 들여다
보는 기분이었다. 서로를 기다려주고, 맞춰주고,
때론 실수해도 웃고 넘어가는 그 태도가
이 체험의 본질이자 아이들의 배움이기도 했다.
만들어진 초콜릿은 정형화된 모양과는 조금 달랐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만든 흔적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가장 예쁜 건 그걸 만들어낸 두 아이의 손끝에 남은 초콜릿 자국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함께 만들었던 초콜릿
체험 시간을 즐겁게 얘기하는 모습이
기억을 오래 들고 있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체험이란 건 결과보다
그 과정이 주는 감정이 크다.
손끝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보는 일,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보는 일,
그 모든 게 아이들에게는
삶을 배우는 가장 자연스러운 수업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이들의 감각을
조용히 지켜볼 수 있어서 그저 고마운 하루였다.
초콜릿랜드에서 돌아온 오후,
제주에서 처음 맞이한 흐린 날씨.
햇살은 잠시 숨었지만, 바람은 기분 좋게 불었다.
그 바람을 알아차린 건 아들이 먼저였다.
“나 마당에서 피크닉 할래.”
대뜸 돗자리를 들고나가더니
마당 한가운데 자리를 펴고는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코코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잔디 위를 뛰놀아 금세 풀잎 냄새가 가득 묻어났다.
둘째도 그 바람의 기분을 놓치지 않았다.
“다들 뭐 해?”
궁금한 듯 다가오더니 오빠 옆에 드러눕고
그렇게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바람을 만끽했다.
말없이 누워 있는 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조화롭고 평화로웠다.
나는 그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했다.
도심에서는 이런 오후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할 일이 없다는 상태가
이토록 풍성하고 자유로울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평화.
마당이 있어 가능한 오후.
주택살이라는 단어에 품었던 그 모든 로망이
지금, 눈앞에서 선명히 펼쳐지고 있다.
"경직된 틀을 깨야,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습니다.
시멘트 건물처럼 갇힌 공간에선 사고가 경직됩니다.
가정에서 규칙이 많으면 생각이 막히고 대화가
자주 끊겨요. 그러니 규칙과 틀은 가능한 한 최소로 만드세요. 여유가 있어야 아이도 자유롭게 생각하고
맘껏 표현할 수 있거든요."
높은 건물들 사이를 벗어나
하늘이 제대로 보이는 곳에서
잔디를 베고 눕는 일상이 이토록
소중한 줄 이곳에 와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보다
이 집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감정들.
바람의 소리, 흙냄새, 그리고
피크닉처럼 가벼운 일상 속 소소한 행복.
초콜릿을 만들던 작은 손의 온기와
잔디 위 바람을 타고 누운 아이들의 고요한 숨결.
제주는, 감각의 언어로 나에게 말을 건다.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하고, 충분히 아름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