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커피를 내리고, 마음을 닦는 제주살이 루틴
제주에 입도한 지 2주 넘었다.
햇살에 쨍하게 말려지던 시간들 속에서
오늘은 처음으로 흐리고 바람이 분다.
제주답다는 말을 실감하게 만든 날씨였다.
이 섬에서 가장 피부로 와닿는 건
예고 없이 밀려드는 날씨의 변화다.
밤사이 달라지는 하늘의 표정,
문득 열린 창 사이로 불어드는 바람,
그 모든 것이 이곳 제주 일상에 스며든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바라보게 되는 풍경은
거실 창 너머 마당 한가운데 선 나무 한 그루다.
나무는 날씨보다 먼저 변화를 알려준다.
제주의 바람은 단지 공기의 흐름이 아니다.
때로는 조용한 위로로,
때로는 거센 질문으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 기상은
삶을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법을
조용히 가르쳐준다.
그리고 이 바람의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하루를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나만의 시간이 찾아온다.
예전 같았으면 쓸고 닦는 시간을
살림에 쏟아부었겠지만
이곳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살림보다는 나를 먼저 다듬고 싶은 아침들.
내가 10년 넘게 반복해 온 작은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핸드드립 커피 내리기.
제주에서도 이 시간은 여전히 소중하다.
끓는 물의 온도를 느끼고
갈아낸 원두를 바라보며
천천히 물을 붓는다.
그 모든 과정이
어느새 나에게 명상이 된다.
오늘은 커피 향을 따라
정약용의 편지를 펼쳤다.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써 내려간
그의 문장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의 내 마음과 닿았다.
겸손한 어휘 속에서도 깊은 단단함이 느껴지는 글들.
그 속에는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학자로서
삶을 견디는 이의 고요한 품격이 있었다.
“내가 너를 낳았지만, 너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너 자신이다.”
정약용이 자식의 자율성과 책임감을 강조하며 남긴 말로 자식을 믿되 그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냉철한 진심이 담겨 있다. 부모가 길을 열어줄 수는 있지만 결국 그 길을 걷는 건 아이 자신이라는 걸 명확히 일깨워주는 문장이 가장 와닿았다.
책장을 넘기며 문득
지금 내가 누리는 이 고요한 아침이
얼마나 값지고 단단한 시간인지 실감했다.
바람이 흔들어 놓은 것은
나무의 가지만이 아니라
내 마음 구석 어딘가에 놓여 있던
불필요한 긴장과 조급 함이었다.
이제는 매일의 날씨를
단순히 기온이나 습도로 기억하지 않는다.
바람의 움직임, 하늘의 깊이,
햇살의 기울기, 나무의 떨림.
그 모든 감각이 오늘의 감정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조용히 내려 앉히는
커피 한 잔.
삶이란, 결국 그런 사소한 결심들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