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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마당을 때리는 빗소리가
유난히 감미로웠다.
도시에서 들리던 자동차 소리 대신
제주의 빗방울은 어딘가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센치한 감성으로 하루를 열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아이들과 함께 제주 민속오일장에 다녀왔다.
매달 2일, 7일에 열리는 오일시장,
마침 주말인 토요일이 12일이었다.
절묘하게도 아이들과 함께 가볼 수 있는 찬스였다.
가는 길 내내 아이들은 들떠 있었다.
“어떤 물건들이 있을까?”
“군것질은 꼭 사야지!”
궁금함으로 눈을 반짝였지만,
막상 시장에 도착하자 그 표정은 사뭇 달라졌다.
빽빽하게 들어선 천막,
비슷비슷한 물건을 소리치며 파는 상인들,
복작이는 인파 속 낯선 냄새와 소음.
마트에 익숙한 아이들에겐 이 모든 것이
흥미롭다기보다 낯설고 약간은 벅찼던 모양이다.
둘 다 한 바퀴 돌기도 전에
“엄마, 이제 집에 가자…”며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잠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시장은 역시 혼자 가는 게 제맛인가."
하지만 뭐 어때?
내 소원 하나쯤은 오늘 이룬 셈이다.
아이들과 제주에서 오일장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었으니까. 그거면 됐다.
시장에서는 원하는 걸 다 구하지 못해
결국 다시 대형마트로 향했다.
그제야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함께 고르고, 담고, 카트를 밀고
도시에서처럼 익숙한 공간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자기 세계로 돌아온 듯했다.
장바구니 가득 채운 식재료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런 날엔 뜨끈한 집밥이 제격이다.
점심으로는 간단하게 밥전을 해줬다.
비 오는 날, 따끈한 밥전에 아이들은 숟가락을
멈추지 않았고 저녁에는 잔치국수를 끓였다.
둘째가 말하길,
“역시 엄마가 해준 국수가 최고야.”
그리고는 커다란 그릇을 한 그릇 뚝딱 비웠다.
제주에 와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마도 집밥의 리듬일 것이다.
육지에선 매번 결심해도 결국 배달의
유혹 앞에 무너질 때가 많았고
아이들 입에도, 내 마음에도
편리함이라는 핑계를 자주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 흔한 배달 앱조차 무용지물.
배달이 되지 않는 집이라는 뜻밖의 제약이
오히려 우리 가족을 다시 식탁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결국 집밥은 귀찮음이 아니라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조금은 더 또렷하게 느낀 하루.
아이들이 따뜻한 국물을 마시며 웃는 얼굴을 보면
역시 밥이 보약이다. 그 보약을 오늘도 내 손으로
지을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