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쓰
음악가들의 이야기라는 말에 줄거리조차 훑어보지 않고 빌려 읽은 책이다. 야구가 비시즌인 현시점에서 나의 가장 큰 도파민은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책을 펼친 지 반나절 만에 몽땅 읽어냈다. 한 문장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는데도 그랬다. 이야기의 배경이나 등장인물의 이름
같은 것들이 판타지적 요소가 많아서 처음엔 “엥?” 했는데 음악적인 배경을 더 강하고 섬세하게 집어넣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얼음나무 숲>은 국가가 아닌 도시로 존재하며 음악의 성지이자 시작지로 불려지는 ‘에단’에서 일어나는 세 음악가 - 고요 드 모르페, 아나토제 바옐, 그리고 트리스탄 벨제 - 와 그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간에 살인 사건이나 판타지적 요소가 가득한 신앙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나는 고요와 바옐, 두 사
람의 서사에 더 집중해서 읽었다. 바옐은 천재다. 바이올린 천재. 고아출신이었지만 천재적인 재능으로 단박에 차기 드 모토베르토(에단에서 가장 유명한 콩쿠르에서 1위를 하면 받게 되는 작위, 이하 콩쿠르 일짱) 후보로 떠올랐다. 고요는 부잣집 귀족출신 막내아들이다. 집안에 음악가가 있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피아
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때는 어린 시절 에단 음악원에서부터였다. 고요와 바옐은 학교 내 이중주 진급시험에서 처음 합을 맞춰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에 트리스탄과 트리오를 이루게 된다. 고요는 바옐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바옐을 존경했다. 정확히는 놀랐다가 질투했다가 결국엔 존경하게 되었다.
이 둘의 혐관(?)이 그렇게나 재밌다…. 어떤 사건이 뙇! 하고 존재하진 않고 (살인사건 제외) 그저 은은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 변화하는 관계를 읽어 나가는 재미가 있어서, 내용이 흥미롭게 느껴진다면 직접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마에스트로와 단 하나의 청중
바옐의 연주를 들으면 모두들 진이 빠져 헐떡거리면서도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었을.. 그런 연주를 들었다는 듯이. 하지만 바옐은 만족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 연주는 바옐의 절규였기 때문이다. 어둡고 어두웠던 바옐의 일상을 연주로 표현해 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절규를 이해했다면 황홀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옐은 ‘관객’이 아닌 자신의 연주를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청중’을 찾아 헤맨다. 고요는 그 단 하나의 청중이 되기를 열렬히 소망했던, 말 그대로 바옐의 광팬이었다. 고요는 평생을 그 청중이 되기 위해 노력했으며 자신이 그 청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분명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음에도, 자신이 바옐을 제치고 콩쿠르 일짱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바옐의 절친한 친구이자 청중이 되기를 원했다. 진짜 등신이다. 아마 고요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야망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연주로 돈 안 벌어도 먹고살 수 있으니까... 취미로 일하는 사람 멋있는 사람 고요..
“아는 세상에 영원히 남을 천재적인 음악가가 되길 바란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사랑하는 한 음악가에게서, 내 모든 경의를 다해도 모자라는 존경하는 한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도 바옐의 그 이기적인 야망이 바옐을 마에스트로의 자리로 이끌어 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고요 또한 바옐에 대한 존경심과 그에 따른 열망으로 명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올랐다. 고요를 보며 무조건적인 존경과 숭배가 때로는 한 인간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존경하는 이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채찍질하는 모든 시간들이 성장과 발전으로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어서 여전히 제자리걸음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바옐은 결국에 자신의 단 하나의 청중을 찾아낸다. 좀 어이없고 웃기긴 하지만 그 청중은 살아있는 자가 아니다. (약간 신? 같은 느낌) 처음에는 이게 뭔 개소리지 싶었는데 나중에 바옐의 제자가 하는 말을 통해 연주자의 의도를 전부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연주자 본인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었다.
(바엘 제자 왈: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하면 안 됨? 나도 귀 있음 ㅇㅇ)
최근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조성진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연주를 할 때 위하는 첫 번째는 연주자 자신, 두 번째는 이 곡을 만든 작곡가, 세 번째가 청중이라고. 자신을 위해연주하는 것이 모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 연주자를 떠나 청중에게 가닿은 음들은 더 이상 연주자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주자는 연주자를 위해 연주하고 청중은 청중의 입장에서 음악을 받아들인다. 그 해석은 청중의 영역이지 연주자의 영역이 아니다. 나는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연주의 이론적 배경을 잘 모른다. 협주곡의 악장 구성이 어떻게 되어있고
각 악장의 빠르기가 어느 정도이며, 연주자가 어떤 기교를 부렸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그냥.. 들으면 좋다. 내 감상문은 막연하게 ~이런 느낌이었다는 문장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게 본질적인 음악의 목적이 아닐까. 청각이 오감으로 느껴지고 그것이 청중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져다주는 것.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청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만한 바옐은 청중의 감상까지 자신의 입맛대로 주무르려다 실패하니 청중을 그저 우매한 관객으로 둔갑시켜 버린 거다. 잘나고 재수 없는 바옐. 그러나 그도 종국에는 알았던 것 같다. 자신의 진정한 청중은 자신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해 준 그 신도, 자신의 의도를 읽을 순 있었지만 느낄 수는 없었던 누군가도 아닌 고요였다는 것을. 자신이 어디서 어떤 연주를 해도 냉철하게 그렇지만 끈질기게 들어주었던, 자신이 유일하게 열등감을 품은 존재였던, 그의 벗 고요였다는 것을 말이다.
음악은 사람을 어디까지 미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말미에 에단의 시민들은 바옐의 연주에 미쳐버린다. 바옐의 약혼자가 죽고 그는 약혼자의 장례식에서 숨이 멎을 듯한 진혼곡을 연주했다. 연주를 들은 이와 듣지 못한 이 모두 약혼자의 아버지가 죽자 바옐에게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어서 연주를 하라고. 약혼자가 죽었을 때처럼 지나치게 잔인하고 황홀한 그 진혼곡을 연주하라고 말이다. 소설 속 전개는 매우 극단적이라 에단의 시민들이 진짜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드래곤이나 박효신 같은 아티스트들이 오랫동안 음원을 내주지 않을 때도, 원빈이 아저씨의 성공 이후 종적을 감췄을 때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요구했다. 음원을 내라. 작품을 해라.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삶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삶을 좀 더 아름답고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것들. 필수적인 것들에는 미치기 어렵다. 그 이면에 강제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차인 것들에는 상대적으로 미치기 훨씬 쉽다. 그곳에 미치는 게 때로는 삶의 이유가 되어줄 정도로. 그래서 우리는 덕질을 한다. 그리고 가끔 그 마음이 삐뚤어진 채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열애설 상대를 욕한다던지, 아티스트의 사생활 영역을 침범한다던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사랑과 증오는 한 세트라서 무언가를 엄청나게 사랑한다는 것은 동시에 엄청나게 증오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마 에단의 시민들도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바옐의 연주를 너무 사랑해서 더 듣고 싶은 마음, 듣지 못한 바옐의 연주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그의 연주를 너무 사랑
해서 연주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 그것이 바옐 본인이라 할지라도 - 증오하게 된 것이다.
어디까지나 네 행복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하렴
고요의 아버지가 고요에게 해준 말이다. 현대사회는 늘 최선을 말한다. 모든 것을 갈아 넣어야 겨우 사회에서 한몫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갓생, 미라클 모닝 같은 것들이 칭송받는다. 치열하게 살아내는 생활자체가 하나의 유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저런 말은 내게 큰 깨달음이자 위로가 되었다. 치열한 삶 속에서 내 행복은 어느 정도였더라? 근데 살짝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저 말을 귀족이 했다는 것...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행복이 다칠 때까지 치열하게 사실 필요가 없는 분들 ㅎㅅㅎ고요의 지나치게 깨끗한 순수함은 그의 풍족한 집안 배경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테다. 당연히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나는 행복이 다치지 않는 선까지만 노력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돈을 벌어 이 한 몸을 먹여 살려야 하는 1인 가구의 가장이니까^_^
그래도 생각해 볼 수는 있겠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 속에 조그마한 행복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틈틈이 더 행복할 수 있는지.
바옐과 파가니니
하지은 작가에 대해 잘 모른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작가가 예술과 종교에 관심이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중 배경 도시인 에단은 ‘에덴’을, 모토벤은 ‘베토벤’을, 바옐은 ‘바하’를, 고요는‘고흐’를 떠오르게 한다. 인물 설정도 마찬가지다 바옐이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에다 악마의 재능을 가졌다는 점에서 실제 인물 파가니니를 떠오르게 하고, 바옐과 고요의 관계성은 쇼팽과 리스트의 관계성을 떠오르게 한다. 실제로 파가니니는 천재적인 실력 때문에 악마로 불리며 죽고 나서도 교회 부지에 묻히지 못했고, 리스트는 자신을 밀어내는 쇼팽을 계속해서 사랑하고 존경했다. 물론 나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오타쿠라 이런 내용들이 떠올랐던 것이고 이런 내용을 하나도 몰라도 소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전혀 없다. 다만 나와 같은 클래식 덕후라면.. 이 소설을 다른 이들 보다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총평을 하자면..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단연 좋아할 장르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판타지적 요소에 반감이 없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