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쓰
이렇게 답답한 책은 처음이다. 책을 읽는 내내 물음표만 떠오르고 끝내 느낌표가 주어지지 않는 느낌. 고구마를 500개나 먹고서는 얼음 한 알을 녹여 겨우내 목을 축이는 느낌이다. 하루키 책은 늘 잘 읽히는 편이라고 했는데 이건 잘 읽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꽤나 철학적이고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의 내용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심지어는 똑같은 문장도 더러 있는 듯했다. 나는 이 책 바로 전에 세끝하원을 읽었기 때문에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간략히 설명해 보자면 열여덟 소년인 ‘나’와 열일곱 소녀인 ‘너’가 만나 사랑을 한다. 소녀는
늘 어떤 도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년은 도시의 모습을 구체화시켜나갔다. 소녀는 여러 의문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고, 소년은 그렇게 중년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도시로 이동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에서 ‘꿈 읽는 이’로 살아간다. 2부에서는 도시에서 탈출한 그림자가 다시 현실로 이동한다. 그는 도시의 도서관에서 꿈을 읽던 자신을 내내 그리워하다 시골 도서관의 관장직으로 일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림자를 잃은 (죽은) 전 관장 고야쓰를 만나고 도시에 가고 싶어 하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도 만나게 된다. 3부에는 도시에서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만난 본체가 다시 현실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아부지 도시를 안다면 정답을 알려줘...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알고 싶었던 한 가지는 “도시”가 대체 뭐냐는 거였다. 사실 <세끝하원>에서 그 세계가 무의식이 만든 도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도시를 ‘나’가 스스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소녀의 설명으로 떠올리기 때문에 실제 하는 도시처럼 느껴졌다. 어쨌거나 하루키는 끝까지 이 도시의 의미를 설명해 주지 않았으니, 해석은 내 몫이다. <세끝하원>에서 나는 그 도시가 ‘나’의 에덴동산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 도시는 반듯하고 조용하다. 도시의 구성원들은 각자에게 할당된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이변이 없다. 그들의 세계는 적당히 이롭고 적당히 불편했으며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었다. 그 세계는 주인공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바라게 된 세계였다. 하지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하 도그불벽)>에서는 몰입된 세계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절히 바라면 그곳으로 향할 수 있고, 그림자나 본체(나는 이걸 개인의 신념이나 의식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변함에 따라 세계가 바뀔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의식을 갖고 도시로 이동을 했고, 도시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로 그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무의식에 잠재된 열망이 아니라 ‘나’가 의식적으로 강하게 열망하는 세계라고 해석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P. 452)
주인공은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 그림자를 떼어내고 눈에 상처를 냈다. 간절히 바라는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 때론 상처를 내고 가치관을 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이 내 세계였고, 대학 때는 사랑이 내 세계였고, 지금은.. 주인공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하루가 내 세계다. 나 역시도 세계가 변하는 순간엔 상
처가 필연적이었다. 위로가 되는 점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세계가 바뀔 수 있고 그에 따라 신념과 가치관이 바뀔 수 있으며 간절히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로 향할 수 있다는 점일까? 어렸을 땐 신념을 버리거나 바꾸는 사람들이 나약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념을 바꾸는 사람들이야 말로 강하고 건강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처를 기꺼이 감수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누가 나약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림자가 먼저 현실로 이동하고 도시에 남아있던 본체마저 현실로 향하려 할 때,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믿는 겁니다. 누군가가 땅에서 당신을 받아주리란 것을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겁니다. 보류하지 않고. 온전히, 무조건적으로.”(P. 744)
세계를 이동하며 낙하할 때 치명적인 결과를 피하는 방법. 믿음. 누군가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무조건적인 믿음. 요즘 <폭싹 속았수다>를 반복해서 봐서 그런가? 예전이라면 그 믿음이 애인에게서 오는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꼭 가족 같다. 내가 변하고 상처받는 그 모든 과정에서 나를 온전하게 받아줄 나의 가족. 그들을 떠올리면 낙하는 추락이 아니다. 나는 거다. 하늘을. 그렇게 날다가 어느 순간 바닥이 코앞에 닥쳐도 괜찮다. 나를 보듬어줄 그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들의 가족은 소년이 사라지자마자 내내 그를 찾았다. 멀리서 공부를 하던 형들도 바쁜 사업가였던 아버지도 모두. 하지만 정작 소년은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몸이 같이 있다고 정신도 함께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번트 증후군으로 추정되는) 소년이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해는 되지만 남겨진 가족들이 애처로운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요즘은 잠이 오지 않을 때 그 도시를 생각한다. 벽으로 둘러 쌓여 평온한 나날을 보내는 그들을 생각한다. 넘치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으며 매일을 묵묵히 살아가는 그들을 생각한다. 금색 털을 휘날리는 외뿔 동물을 생각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도시를 그려본다. 내가 원하는 나의 도시를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암흑이다.
번외의 이야기
책에 스타카토가 많다. 정확히는 따로 명칭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편의상 스타카토라고 부르겠다. 처음엔 세계를 연결해 주는 혹은 뭔가를 암시하는 문장에 표시되어 있는 건가 싶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기준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짐. 하루키는 이 스타카토를 글을 써가면서 붙였을까 아니면 글을 다 쓰고 한 번에 붙였을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다 쓰고 원고에 스타카토를 붙이는 하루키의 모습을 상상하니 꽤 귀엽고 웃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