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자
"오빠."
내가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를 불렀다. 나에게는 아주 촌스러운 습성이 있었는데, 그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그저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데 그 앞에 이름을 붙여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반대로 상대방에 내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면, 나는 그것 또한 쑥스러워서 몸을 비비 꼬았다.
"오빠."
그가 대답 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해서 나는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 손가락 마디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았다가 내 손을 보았다가 하더니, 고개를 수그리고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 불러줘."
"네?"
"...로.. 불러봐 봐."
"뭐라고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뭐야.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나는 그 모습이 퍽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그때 그저 이름을 붙여 그를 불렀더라면, 지금은 조금을 달랐을까. 그가 어떤 생각이었는지 내가 알았다면, 그가 심술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우리 둘 다 조금은 성숙했더라면 달랐을까. 나는 이름을 불러보려다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서 괜스레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아, 싫어요."
그는 갑자기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만지작거리던 내 손가락 마디 부분을 꾹 누르더니, 갑자기 무서운 눈으로 나를 거의 쏘아보며 말했다.
"이름을 안 부르면, 네 그 수많은 오빠들 중에 내가 누군지 모르겠잖아."
뭐?
"너에 대해서 말을 좀 해봐. 그렇게 웃지만 말고."
뭐라고요?
"무슨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어. 불안해."
불안해.. 그건 내가 느끼는 마음이었다. 그가 불안을 느낄 리가 없었다. 나는 그 당시만 해도 서른 살, 이라는 것의 무게에 대해 거의 신화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서른 살이 넘으면 어른이 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어린아이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지금껏 그 숱한 소문들로 알아온 그는, 여자관계에서 절대로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는 그랬다.
한편으로 나는 그가 말한 '네 그 수많은 오빠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어리벙벙해졌다.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할수록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를 무슨 창녀 취급을 하는 거야? 나는 정말로 화가 났다.
"무슨 소리예요, 진짜. 오빠들이라니."
나는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면서 말했다.
"... 아니야, 농담이야."
그가 한 동안 나를 보고 있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말이 없었다. 나는 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화난 표정으로 계속 그를 쳐다봤다. 뭐야 진짜? 사람 우습게 만들어 놓고? 그가 내게 어떤 해명을 원하는 건지, 아니면 장난을 치는 건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이제는 같이 있어도 불안했다. 전에는 그가 떠나고 난 뒤에 다시 그를 볼 수 없을까 봐 불안했는데, 이제는 그와 같이 있어도 불안했다. 나는 구역감이 났다. 이제 이런 모든 불분명한 것, 감추는 것, 미적지근한 것들에 모두 화가 났다.
만유인력
거의 그로부터 5년 정도나 지난 뒤에야, 나는 사건의 전말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전공의 1년차였나, 2년차였나, 그것도 아니면 1년차에서 2년차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나. 나는 오랜만에 동아리 술자리에 나갔다. 그런데 그와 친하다고 알려진 고학번 선배가 참석해 있었다. 나는 그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남은 자리가 얼마 없어 우연찮게 그 앞에 앉게 되었다.
그는 내게 이런저런 근황에 대해 묻더니 갑자기 미안하다,라고 했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나에 대해 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도통 무슨 말인지를 몰라서 재차 물었다. 선배가 말하기를, 내가 한참 그와 만나고 있을 적에 선배에게 고민상담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한참 어린 후배랑 만나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그 애는 아직 어려서, 자기가 얼마나 앞서 나가도 될지 모르겠다고.
당시 그 선배는 나와 같은 학번 동기 여자아이와 교제하던 중이었다. 나는 그 여자아이와 친하다면 친하고, 또 안 친하다면 안 친한 사이라고도 볼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 아이가 나를 싫어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선배는 당시 여자 친구로부터 나에 대한 험담을 많이 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내가 남자관계가 아주 복잡하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 만났던 그가 자신에게 나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순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오히려 네가 휘둘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는 선배 앞에서는 그저 웃어넘겼다. 아유, 뭐, 기억도 안 나요. 결혼 준비하고 있는 사람한테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의지만으로는 이어지기 참으로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했다.
결국 그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저 남들에게 들은 말들, 주워들은 소문들, 선입견, 이런 것들로 범벅이 되어서 우리는 관계를 망친 걸까? 우리는 처음 서로에게 겉모습으로 끌렸던 것처럼, 그 겉모습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리도 괴로워했던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았지만, 결국에는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내가 계속 만났어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오해들로 인해 결국에는 서로를 잡아먹었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아련한 기억의 편린으로 남아있는 편이, 서로에게 더 좋았다. 재미있게 시작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한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