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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예 May 13. 2020

10. 역겹고, 아름답고, 바스러지는 기억-1

이상한 일주일


그러니까, 그 날은 처음부터 모든 게 이상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그 일주일 내내 이상했다. 그 주는 내가 그 과에서 일을 하던 마지막 주였다.


월요일


월요일 아침부터 절대로 지각을 하지 않는 그가 잔뜩 멋쩍어하며 출근 시간을 훌쩍 넘겨 등장했는데, 나는 평소와 다르게 정돈되지 않은 그의 머리가 웃겨서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다. 나는 내 예상보다도 더 크게 웃어버리는 바람에 그화를 내지는 않을까 순간적으로 걱정이 되었다.


"뭐야 왜 이렇게 신이 났어."


내가 활짝 웃자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는 갑자기 내 옆으로 와서 내 볼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뭐지?


나는 순간 이 사람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서 그를 쳐다봤다가, 아무렇지 않은 일인 척, 그냥 좀 친해진 인턴과 전공의 사이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스킨십인 척,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 볼을 다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두 손을 뒤로 숨겼다.


"아니 원래 잘 안 늦잖아요. 완전 머리도 엉망인데. 대박 웃김."


나는 제발, 제발, 제발 내 얼굴이 붉어져있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런 갑작스러운 카운터 어택에 약한 편인 데다가, 내가 항상 받는 오해와는 반대로 남자를 대하는 데 익숙하지가 않았다. 특히나 나는 잘생긴 남자에게는 거의 공포 수준의 어색함을 느껴서 일부러 피하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주변에 조금 괜찮게 생겼다 하는 남자아이들은 친해지고 난 뒤에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는데, 내가 본인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나는 아침부터 뜻밖의 일격을 받아버려서 볼도, 마음도 좀 얼얼했다.


"오빠 얼른 거울 봐요. 환자들이 보고 못생겨서 도망갈 듯."


그가 대답 없이 싱글싱글 웃고만 있어서 나는 아무 말이나 지껄여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아, 맞아, 이런 사람이라고 그랬지. 역시 그 소문들이 다 헛된 게 아니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고, 어, 이러고 다니니까 자꾸 여자들이랑 얽혀서 그런 소문이 나지. 잘생기면 함부로 친절하면 안 된다는 말도 모르나, 왜 나는 가만히 있는데 이렇게 해가지고. 왜. 왜..


왜 두근거리게 만들지?


화요일


그러나 나는 금세 그 일을 잊었다. 잊어야만 했다. 내가 잠시라도 두근거렸던 것이 민망할 정도로 그는 내게 눈에 띄게 사무적으로 대했다.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보면서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고, 흔히 치던 장난도 받아주지 않았다. 원래는 별명 삼아 내 이름의 이니셜로 나를 부르고는 했는데, 아주 딱딱한 말투로 선생님,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이번 주가 끝나면 다시 지방 분원에 가서 응급실 인턴을 해야 했는데, 내가 걱정하거나 우려한 것보다도 이 곳에서의 기억이 좋아서 아쉬운 마음까지도 들었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주에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한 사람이 내게 보란 듯 거리를 두자 나는 좀 의기소침해졌다.


"저.. 오빠..? 선생님?"


내가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

"어.. 이거.. 이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내 자리의 컴퓨터를 가리켰다.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나를 한 번 봤다가, 컴퓨터를 봤다가, 다시 핸드폰에 고개를 박으며


"하아...."


하고 아주 커다란 한숨을 쉬었다.


'아, 진짜, 대박, 겁나 재수 없어.'


나는 속으로 엄청나게 욕을 했다. 아니 뭐야 왜 저래, 사람 민망하게. 여자한테 까였나, 지 혼자 기분 나빠가지고, 왜 나한테 난리야 진짜. 재수 없어.


그러다가 나는 문득 불안해졌다. 혹시 내가 어제 두근거린 거, 설렌 거 들킨 거 아냐? 그래서 아니 지 까짓 게 감히 나를? 이렇게 생각해서 일부러 거리 두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그가 다시 대답을 하기 전에 재빠르게 말했다.


"아,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인계장 보면 될 것 같아요. 제가 해보고, 해보고 다시 안 되면, 그때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보았다. 평소에는 끝이 약간 쳐지고 둥글어서 선해 보이는 그의 눈이 어딘가 모르게 매서워서 나는 말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씩씩거렸다. 물론 내면의 씩씩거림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눈물이 찔끔 날 것도 같았다. 왜 그러지? 왜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이럴 거면 처음부터 친하게 지내지나 말지. 나는 평소보다 조금 세게 타자기를 두드렸다. 그러다 화난 게 들킬 것 같아서 슬쩍 그가 앉은 쪽을 쳐다보았다. 내게 짜증 부린 게 미안해서 조금은 신경을 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잔뜩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럴 거면 집에나 갈 것이지 짜증 나게..'


나는 투덜거리면서 일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까스로 병원 식당이 문을 닫기 직전에 일을 끝내고 기지개를 켜며 그가 있던 쪽을 보자 텅 빈 의자만 있었다. 인사도 없이 가다니. 나는 어제 제멋대로 설렌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그가 원망스럽기도 해서 짜증스럽게 책상을 어지르고는 가방을 챙겼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내가 치워야겠지만.


수요일


다음 날 그는 일찍이 출근해서는 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핸드폰에 뭐 재미난 거라도 숨겨놨는지, 아침부터 고개를 잔뜩 수그리고는 손가락을 휘휘 올리며 화면을 보고 있는 꼴이 좀 아니꼽게 느껴졌다. 그건 아마도 어제부터 내가 그에게 감정이 상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정말로 인사를 하기 싫었지만 20년 이상 버릇처럼 벤 인사 습관으로 인해 반자동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그가 잠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어쩐지 어제보다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여서 나는 안심이 되었다. 아니다, 괜히 또 기대해봤자 나만 또 친한 척하는 꼴이 되면 어떻게 해? 그냥 나도 적당히 선 지키자. 저 사람이랑 언제부터 친했다고. 나는 일부러 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로 자리에 앉아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뒤에서 어쩐지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날 오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나는 일 년 가까이나 이 일을 했는데도 바쁜 게 싫었다. 밥시간 못 지키는 것도 싫었고 항상 긴장 상태로 뻣뻣하게 있어야 하는 것도 싫었다. 다른 친구들은 병원 생활을 하면서 제일 싫은 게 진상 환자들 만나는 일이라고 했는데, 나는 어쩐지 환자들에게만은 아주 너그러웠다. 가끔 나는 '내가 바로 그 친절한 의사입니다'라는 생각에 도취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는데, 그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내 예상처럼 그는 그렇게 착하거나 인자하지만은 않아서, 자신이 취해있는 그 환상이 깨질 때면, 그러니까 아주 아주 지독한 환자를 만나 호되게 당할 때면, 화를 참느라 입꼬리가 씰룩거리고는 했다.


거하게 점심을 먹고 온 뒤에 치프 선생님이 커피 심부름을 시켰고, 나는 카드를 들고 쭐래쭐래 커피숍으로 향했다.


'여기서 시간 최대한 오래 끌다가 들어가야지.'


나는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서는 줄 가장 뒤에 서서 느긋하게 주문을 기다렸다. 그때 누군가 내 옆에 쓱 다가와 말을 시켰다.


"오랜만이네."


내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서 있었다.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이름이.. 나는 재빨리 가운 주머니를 스캔했다. 아, 맞다. 내과 인턴일 때 주치의 선생님이었지.


"아.. 안녕하세요!"


나는 기억하지 못한 것을 숨기려고 일부러 더 밝게 인사했다.


"지금 무슨 과야?"

"아.. 지금 X과 요."

"아 거기 인턴 일 좀 빡세지 않아?"
"네 빡센 것도 그런데 좀 귀찮기도 하고. 선생님은 잘 지내시죠?"

"나야 뭐 비슷하지. 교수들 지랄하는 거 들어주고 맨날. 커피 마시러 거야?"

"아 심부름이요. 제 것도 사가려고요 근데."

"야 무슨 걔네는 아직도 그런 걸 시키냐. 인턴한테. 게다가 다 아메리카노 시켰지?"

"하하.. 네."

"넌 내가 그냥 따로 사줄게. 비싼 거 골라."


어.. 음.. 나는 사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가장 싼 음료와 가장 비싼 음료의 중간에서 약간 더 싼 쪽에 가까운 적당한 음료를 골랐다.  


"좀 앉아서 먹다 가. 어차피 가봤자 바로 일해야 되잖아."

"근데 빨리 안 갖다 드리면 좀.."

"그런가? 맞아 거기 성격 거지 같은 애들 좀 있지."

"허허.."

"그래 그럼 가보고 다음에 보자~"


뭐야 저 사람.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나한테 남의 욕 엄청해. 나는 앞에서는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뒤돌자마자 흉을 봤다. 지네 과 돌 때도 일 엄청 시켰으면서 아닌 척하네. 친한 척 대박이야 진짜. 나는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커피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야 뭐냐? 너만 비싼 거 먹네?"


그가 다시 이전 같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좀 삐진 게 풀리지 않아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 이건 의국 카드로 산 거 아니에요."

"뭐야 네 돈으로 사 먹었어? 장난이지! 의국 카드로 사 먹어도 돼!"


그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깜짝 놀란 듯이 당황하며 말하길래 나도 모르게 변명하듯이 말을 덧붙였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W 선생님이 사주셨어요. 저기서 만나서."


내가 그렇게 말을 하자 그가 눈을 조금 가늘게 뜨더니 물었다.


"그 형은 또 어떻게 알아?"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하.. 지겨워. 또, 또 남자관계 복잡한 여자 취급인가. 내가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의 말투에는 분명 그런 의심이 섞여 있었다. 야, 얘 봐라? 아는 선배도 많다, 어? 나는 폴리클 시절 내게 '나는 네 그 수많은 오빠들 중 대체 누구냐'라고 물었던 누군가와, 예과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너는 클럽도 많이 다니고 놀 줄 알게 생겼다'라고 말했던 무례한 동기와, 인턴 중반쯤 남자 친구는 없다는 내 말에 '동시에 남자 2-3명은 만날 것 같은데  왜 애인이 없어'라고 말했던 미친놈을 떠올렸다. 그래서 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내과 인턴을 돌았으니 알죠. 뭐 어떻게 알아요."


나는 그에게 커피를 건네주고는 짜증스러운 발걸음으로 내 컴퓨터 앞에 가서 앉았다. 그가 커피를 들고 벽에 기대서는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야 근데 그 형 좀 이상해."


예예, 어련하시겠어요.


"진짜로. 별로 안 친하게 지내는 게 좋을 걸."


예예, 자아아알 알겠습니다. 너랑도 안 친하게 지낼 거고요- 재수 없어서요-


"그런가. 어차피 별로 안 친해요."


내가 그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갑자기 말이 없었다. 화났나? 싶었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왠지 그가 계속해서 내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는 돌아보기가 겁이 났다. 왜 겁이 났는지는 모를 노릇이다. 이대로 눈이 마주치면 내가 간질간질하게만 느끼고 있던 우리 둘 사이의 어떤 것이 기정 사실화되어 버릴 것 같아서? 아니면 그냥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착각하고 있던 걸 확인해야 돼서? 어떤 쪽이든 가뜩이나 혼돈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내게는 좋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그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려고 하는데, 그는 말없이 반 묶음을 한 내 머리 꽁지를 손으로 가볍게 움켜쥐었다.


엥?


내가 정말 엥, 하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자 그가 황급히 머리를 놓은 뒤에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야, 얼음 녹는다. 얼른 마셔."


그리고는 좀 당황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뒤돌아 걸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혼란스러워져서 도대체 이 사람이 내게 왜 이런 행동들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고민을 하면 할수록 나는 괴로워졌다. 이미 내가 두근거리고 있는 게 느껴졌고, 나는 두 손가락을 꼭 쥐고 있었으며, 두 뺨은 만지지 않아도 빨개졌다는 것이 자명했다.


아, 진짜 싫은데.


나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생각했다.


아, 진짜 싫은데. 이 복잡하고 괴로운 거. 다시 하기 싫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이미 나는 수렁에 빠지고 있었음을 사실 나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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